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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장경세가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을 본따서 지은 가사 작품. 장경세(張經世)[1547~1615]의 문집인 『사촌집(沙村集)』 권2에 전한다. 장경세는 어려서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읽고 시가 가지는 효용이 잘 드러났다고 여겼는데, 그 후로 10여 년 뒤 다시 「도산십이곡」을 읽고는 어려서 느낀 벅찬 감정이 떠올라서 곧 「강호연군가」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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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노진이 가을 국화를 보며 지은 오언절구의 한시 작품. 노진(盧禛)[1518~1578]의 『옥계집(玉溪集)』 권1에 전한다. 黃菊開時晩 嚴霜尙未萎 空庭步凉月 憑爾付心期 (황국은 피는 시기도 늦은데/찬 서리 속에서도 시들지 않네/차가운 달빛 아래 텅 빈 뜰을 거닐다/너에게 마음을 주어 볼까 하노라) 먼저 첫째 구와 둘째 구에서는 늦가을에 피어서 서리를 맞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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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광해군 10)에 조위한이 남원을 배경으로 쓴 고대 소설. 「최척전」은 조선 중기의 문신 조위한(趙緯韓)이 한문으로 쓴 고대 소설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호족의 명나라 침입 등의 전쟁을 겪는 동안 주인공 최척 일가와 주변 사람들이 겪는 기구한 삶의 역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최척은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역사상 실제 있었던 전쟁을 시대 배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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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유몽인이 채록하여 『어우야담』에 수록한 짧은 이야기. 유몽인은 53세 때 남원부사가 되었는데, 그 해에 벼슬을 사직하고 고흥에 은거하였다. 당시 남원에서는 ‘홍도 이야기’가 실화로서 널리 유포되어 있었는데, 이때 유몽인에 의해 수합되어 「홍도전(紅桃傳)」이란 이름으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린 것으로 생각된다. 「홍도전」은 소설 「최척전(崔陟傳)」에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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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문인 유동연의 유고 시문집. 유동연(柳東淵)[1613~1681]의 자는 정숙(靜叔), 호는 남간(南磵),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에서 태어났으나 여섯 살 때 남원으로 와서 성장하였다. 최온(崔薀)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사산감역(四山監役)을 부여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뭍혀 학문에 정진하였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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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유호의 유고 시문집. 1857년(철종 8)에 유호(柳灝)[1576~1646]의 글들을 모아서 6대손인 유진호(柳震浩)가 간행하였다.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본서의 저본은 1857년 목활자로 간행된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다. 4권 1책이며, 목활자본이다. 표제는 뇌천집(磊川集)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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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 학자 김지백의 유고 시문집. 남원에서 태어난 김지백(金之白)[1623~1670]은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명리를 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인물로, 사부일기류인 『유두류산기(遊頭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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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황위(黃暐)[1605~1664]의 유고 시문집. 황위는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명성이 자자한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후손이다. 사마(司馬) 문과(文科)를 거쳐 기성서윤(箕城庶尹)에 이르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원에서 창의한 지사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남원 풍계사(楓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역대 충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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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 삭녕최씨(朔寧崔氏) 5인의 시문 합철집. 『대방세고(帶方世稿)』는 최익효(崔翊孝)가 최상중의 『미능재집(未能齋集)』과 최연의 『성만집(星灣集)』, 최온의 『폄재집(砭齋集)』, 최휘지의 『오주집(鰲洲集)』, 최유지의 『간호집(艮湖集)』 등 남원에 세거한 최씨 일가의 시문집을 합철하여 편차한 것이다. 최연과 최온은 최상중의 아들이며, 최휘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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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에 간행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의병장인 변사정의 유고 시문집. 변사정(邊士貞)[1529~1596]은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3년(선조 1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 2천 여 명을 사살하고, 그 공으로 1595년 첨정(僉正)으로 승진되었으나 벼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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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순의 유고 시문집. 이이순(李以恂)[1567~?]의 자는 희지(熙之), 호는 동림(東林)이며, 활계(活溪) 이대유(李大유)의 아들이다. 『동림유고』는 이대유의 문집인 『활계유고(活溪遺稿)』 뒤에 합철되어 있다. 『동림유고』는 김상현(金尙鉉)·이교영(李喬榮)의 발(跋)을 붙여 1940년 부친 이대유의 문집 뒤에 합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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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염의 시문집. 정염(丁焰)[1524~1609]은 임진왜란과 정여립의 난 등 조선이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에 변함없는 우국충정을 보여 준 인물이다. 『만헌집(晩軒集)』에는 나라와 시대를 근심하고 최선의 대안을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만헌집』의 편찬 과정이나 발간 연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서의 저본은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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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김선의 유고 시문집. 김선(金宣)[1564~1614]의 자는 성시(聖始), 호는 백졸(百拙)·최락당(最樂堂)이며,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백졸집(百拙集)』은 김선의 손자들인 김익환(金益煥)·김익래(金益來)·김태기(金兌淇)가 편집하여 1882년(고종 19)에 간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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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장경세의 유고 시문집. 남원 출신 유학자인 장경세(張經世)[1547~1615]의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이다. 경사백가에 두루 통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 덕행과 문명이 높았던 노진(盧禛)·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과 교유하였다. 1806년(순조 6)에 7대손 장윤(張玧)이 유고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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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무인 조경남의 유고 시문집. 조경남(趙慶男)[1570~1641]은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남원 지방에서 창의하여 학행과 절의로 이름을 떨친 의병장이다.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이며,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당시를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을 남기기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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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 학자 하만리의 유고 시문집. 하만리(河萬里)[1597~1599]의 자는 자장(子長), 호는 양진(養眞)이며, 관향(貫鄕)은 진주(晉州)이다. 남원 출신의 유학자로, 학행과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8대손 하진천(河鎭天)과 9대손 하영진(河永晋) 등이 편집하여 1911년 2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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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발간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덕열의 유고 시문집. 이덕열(李德悅)[1534~1599]의 자는 득지(得之), 호는 양호당(養浩堂)이며, 남원부 주포방(현 남원시 주생면 유매리)에서 살았다. 1567년 진사시를 거쳐 수찬(修撰)과 승지(承旨) 등을 역임했다. 김홍락(金鴻洛)의 서(序)와 증손 이웅징(李熊徵), 권명섭(權命燮), 10세손 이병수(李秉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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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진의 유고 시문집 노진(盧禛)[1518~1578]은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44세에 남원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처향이라는 이유로 사직하고 담양 부사가 된다. 『옥계집(玉溪集)』에는 노진이 젊은 시절 남원에서 아내와 만난 이야기가 「노진 설화」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는 이후 「춘향전」의 근원 설화의 하나로서 주목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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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 오세웅의 시문집. 오세웅(吳世熊)[1633~1685]은 전라북도 남원군 아영면 봉대리 출신으로 두암 오상덕의 후손이다. 자는 군복(君卜), 호는 운담(雲潭)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문은 건옹(健翁) 김양순(金陽淳)[1776~1840]이 지었고, 노사(蘆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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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조희문의 유고 시문집. 조희문(趙希文)[1527~1578]의 자는 경범(景范), 호는 월계(月溪)이다. 남원 출신으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당시 기대승(奇大升)·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1798년(정조 22)에 후손 조중관(趙重瓘)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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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 양경우의 시문집. 양경우(梁慶遇)[1568~?]는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다.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蓼汀)·태암(泰巖)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는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임진왜란을 당해서 부친 양대박과 동생 양형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양경우는 생전의 시문을 모아 스스로 편차한 뒤에 시 2책, 문 1책으로 정리하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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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 송기수의 시문집. 송기수(宋麒壽)[1506~1581]는 전라북도 남원군 보절면 괴양리 출신이다. 자는 태수(台壽), 호는 추파(秋坡)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이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발간 경위를 살필 수 없다. 8권 4책의 인쇄본이다. 문집 내용은 시(詩)·교(敎)·소(疏)·차(箚)·계(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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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 이대유의 시문집. 이대유(李大유)[1540~1609]는 전라북도 남원군 출신으로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후손이다.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만헌 정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여러 번 천거되어 조정에서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이근(李頤根)의 서를 붙여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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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 관리의 공적을 기록한 30개의 비.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春香祠) 옆에 30기의 비석이 담장을 따라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다. 전라도나 남원에 수령이나 어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거나 남원 지역민에게 덕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선정비·불망비·선덕비·사적비·시혜비이다. 본래 동헌이나 부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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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필(良弼), 호는 송계(松溪). 순창군 팔덕면 사정리 출신으로, 문양공 강희맹(姜希孟)의 7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강창국(姜昌國)의 아들이다. 강대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용모가 준수하며 기개가 강개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종묘사직이 위기에 처하자, 부친의 명에 따라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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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양(晉陽). 은렬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다. 강덕복은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뜻이 견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발탁할 때 남원부에서 추천하여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수성령(宿星嶺)에서 왜적 6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뒤에 화살도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순절하였다. 아내 양씨(梁氏)가 진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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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응지(應趾), 호는 월당(月塘).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찰방 강근(姜瑾)이다. 강인상은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고, 지조와 절개가 굳세었다. 1576년(선조 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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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보일(輔日), 호는 삼봉. 순창군 팔덕면 사정리 출신으로, 문량공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이며, 성균관 생원 와서별좌 강덕인(姜德麟)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인 강대한과 함께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의군진이 있는 금산으로 가서 싸웠으나, 7월 10일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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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정월을 비롯한 농한기에 마을 주민들이 집단으로 풍악을 치면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그 집의 안녕을 빌어주던 놀이. 마당을 비롯하여 부엌, 창고 등을 다니면서 풍악을 치면 부정한 것들이 사라진다고 믿는다. 집 주인은 풍악을 치는 풍악패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쌀이나 돈으로 사례를 하기도 한다. 여기서 거두어진 돈이나 쌀은 마을 공동 사업에 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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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용담(龍譚). 자는 은보(殷甫). 현감 고익흥(高益興)의 후손이며, 종사랑 고효륜(高孝倫)의 아들이다. 고득뢰는 기절이 있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한 뒤 감찰(監察)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는 평창현감(平昌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완강하게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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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정월 초여드렛날 지내온 풍속. 음력 초하룻날로부터 여덟 번째 날로 곡일(穀日)이라고도 한다. 농사를 위해 씨앗을 광이나 다락 등에 보관해 두었다가 곡식날이 되면 밖으로 내어서 햇볕을 쪼이기도 하고 씨앗 상태를 점검하기도 한다. 그리고 새해 농사를 위해 농기구를 점검하기도 하고 축사를 보수하기도 한다. 곡식날 씨앗을 비롯하여 농기구와 축사 등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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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에 있는 산성별장(山城別將)의 도장. 승려 처영에게 하사한 구리로 만든 도장이다. 처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교룡산성의 승병장이 되어 성을 크게 수축(修築)하고 전란에 대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산성별장(山城別將)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이 도장을 새겨 하사하였다. 도장은 산성 내의 선국사 주지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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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발판이 달린 두 줄을 나무에 매고 그 위에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올라가서 줄을 앞뒤로 흔들리게 하면서 노는 놀이. 그네는 주로 마을 입구나 마을 뒤의 정자나무에서 하였다. 줄만 매어 있으면 언제나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단오에 가장 대표적으로 하는 놀이다. 그네뛰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혼자 그네를 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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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기묘제현이 안처순에게 보낸 서신을 묶은 서간첩. 『기묘제현 수첩(己卯諸賢手帖)』은 1517년(중종 12)부터 1531년(중종 26)에 이르는 15년간 동료·붕우 열세 명이 지방관리로 재직하고 있던 안처순(安處順)[1492~1534]에게 보낸 서신을 손자 안응국(安應國)이 묶어서 만든 서간첩이다. 안처순에게 서신을 보낸 이들은 훗날 기묘사화에 휘말려 죽음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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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처녀들이 일렬로 길게 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몸을 구부려 몸이 기와 모양이 되도록 하여 그 위를 밟고 앞으로 이동하며 노는 집단 놀이. 놀이에 참여하는 20세 미만의 소녀와 처녀들이 일렬로 길게 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몸을 구부려 몸이 기와 모양이 되도록 한다. 그러면 맨 뒤의 사람이 앞 사람의 허리에 올라서서 앞으로 걸어가고 맨 앞까지 오면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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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숙(惺叔). 고려 때의 판서(判書)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현령(縣令) 김원(金騵)의 아들이다. 김경로는 어릴 때부터 여력이 출중하고 총명하여 열심히 경전을 읽었으나, 중년에 안질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무의 실력을 견줄 만했던 황진(黃進)과 같이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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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의 7세손이며, 쌍송당(雙松堂) 김광석(金光奭)의 아들이다. 김경장은 품계가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금정에서 임금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피로써 맹세한 뒤 여러 고을의 의병과 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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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쌍송당(雙松堂) 김광석(金光奭)의 아들이며, 김경장(金慶長)의 아우이다. 김경적은 창신교위를 지냈는데,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형 김경장과 의병을 일으켰다. 김경적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을 맹세하였다. 이어 여러 고을의 의병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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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굉(子宏), 호는 쌍송당(雙松堂).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8세손이며, 참의(參議) 김위(金偉)의 아들이다. 김광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자라서는 지절이 강개하여 서울의 사우들이 충의의 선비로 존경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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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원. 직제학 김작의 후손이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현감 김사종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장사 50여 명을 모아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후 광교산으로 들어가 전라병사 김준룡과 함께 적병을 맞아 싸워 큰 전공을 세웠으며, 여기에서 호장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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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정(子淨). 수은 김충한(金冲漢)의 후손으로, 퇴한재(退閑齋) 김천로(金天老)의 아들이며, 월호 김집의 아우이다. 김급은 무과에 급제한 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대구영장으로 옮겼다가 용양위부호군을 지켰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인 김집과 함께 여산으로 달려가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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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정중(正中). 동창공(東窓公)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인데 김일손(金馹孫)에게 양자를 갔다. 1498년(연산 4)의 무오사화 때 아버지 김준손을 따라서 큰형과 함께 호남에 귀양을 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1518년(중종 13) 조광조의 천거로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가 남원군 보절면 진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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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계복(金啓福)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장으로서 자원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많은 적을 죽였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군량 수백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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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慶州).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이다. 1579년(선조 12)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쳔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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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심(士心). 정숙공 김양경의 후손이며, 진사 김문세(金文世)의 아들이다. 두 아들 김덕원과 김덕흥은 모두 참봉을 지냈는데, 김덕흥은 뒤에 사헌부지평의 증직이 내려졌다.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한 뒤 인조반정 때 수문장이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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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했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화가(和可), 호는 만은(晩隱).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며, 김순례(金順禮)의 아들이다. 김벽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4년(중종 29)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천거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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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했던 의병. 김복흥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사와 군량을 모아 권율 장군과 명나라 지원군을 도왔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언(景言), 호는 계곡(谿谷). 좌의정 양경공(襄景公) 김승주(金承霔)의 후손이며, 사정(司正) 김익창의 아들이다. 김복흥은 효성이 지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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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선(繼先). 판서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진사 김백준(金百俊)의 아들이다. 김사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사천현감(沙川縣監)으로 있었다.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서 힘을 다하여 적을 맞아 싸우다가 황진과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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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회(汝晦).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예이며, 한림(翰林) 김미(金楣)의 고조손이다. 김성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판관(判官)으로 있었는데, 도탄(桃灘) 변사정(邊士貞)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팔량치(八良峙)에서 적과 대치하여 싸워 많은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김성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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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여(用汝).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다. 김약려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따라서 사촌 동생 김용려(金用礪)와 함께 행동하지 못하였다. 김약려는 눈물을 흘리며 “은(殷)이 망하니 백이(伯夷)는 수양산에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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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뇌여(賚予).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최락당 김선(金宣)의 아들이다. 김여려는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서 북으로 올라가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도중에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늙도록 세상에 나오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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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의 남원 출신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장원(長源), 호는 도촌(陶村).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아들이다. 김연(金沇)[1587~1651]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조에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형인 재간당 김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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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대여(代汝).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수성재(守性齋) 김정(金定)의 아들이다. 김용려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행의(行誼)가 고매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서 북으로 올라가는데,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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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비연(斐然). 고려 때 시중을 지낸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후손이다. 충경공 김경직(金敬直)의 10세손이며, 봉사(奉事) 김중흥(金重興)의 아들이다. 김욱은 그릇이 넓고 지략이 뛰어나 광해군 때 문음(門蔭)으로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비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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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이(子以). 개국원훈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의 7세손이다. 완암 김영진(金英振)의 아들이다. 김원건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늘 고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오랑캐들이 서울로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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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방(子方).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진사 김원건(金元健)의 아우이다. 김원구는 경서와 사기를 두루 읽어 문예가 일찍부터 뛰어났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노비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갔다가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후 과거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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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갈천(葛川).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후손이고, 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의 7세손이며, 참판 김성진(金聲振)의 둘째 아들이다. 김원립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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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수(士秀), 호는 화우당(華憂堂).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후손이고, 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의 7세손이며, 판서 김인손(金麟孫)의 고손자이고, 충의위 김광보의 아들이다. 김원준은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효성과 충의의 마음이 지극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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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위(士威), 호는 당계(堂溪).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고, 참판 김성진(金聲振)의 아들이다. 김원중은 효성이 지극하고 몸가짐이 간결하며 절의가 있었다. 광해군 때인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사건이 일어나자, 윤리가 무너짐을 슬퍼하고 남원에 은거하였다.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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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기(汝器), 호는 만취정(晩翠亭). 계림군 김균(金稛)의 7세손이고, 선략장군 김귀손(金龜孫)의 손자이며, 현령 김사걸(金士傑)의 아들이다. 김위는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내외의 요직을 거쳐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형조참의(刑曹叅議)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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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달원(達源).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아들이다. 김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87년(선조 2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계 양대박(梁大樸)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공급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뒤에 아버지 김익복이 의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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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시재(時哉). 밀직사 김귀갑(金貴甲)의 후손이며, 김의택(金義澤)의 아들이다. 김응배는 힘이 세고 담력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웅치(熊峙)의 싸움에 나아가 많은 적병을 죽였는데 그 공으로 사과(司果)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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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김익복은 순흥안씨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의 손자사위가 되어 남원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대대로 남원에 세거하여, 지금은 전라북도 남원시 남골[木洞]과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창(社倉)에 살고 있다. 아들 김유(金瀏)는 정유재란 때 운량관(運糧官)으로 공을 세워 교관(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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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경(揚卿), 호는 추곡재(楸谷齋). 참찬(參贊) 김충익(金冲益)의 후손이며,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된 김신추(金愼樞)의 아들이다. 김익웅은 어버이를 효로 섬겼고 담력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의 상중인데도 의병을 일으켜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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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숙(止叔), 호는 수성재(守性齋).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감정(監正) 김취련(金就鍊)의 아들이다. 김정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를 극진히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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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진경(眞卿), 호는 담암(澹庵), 또는 용암(舂岩).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이고,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손자이며,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의 아들이다. 김지순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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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득상(得祥), 호는 우송(友松). 문정공(文貞公) 김자지(金自知)의 9세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승경(金承慶)의 손자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정에서 내려온 5현(五賢)의 격문을 보고 아우 김진웅(金震雄)·김진용(金震龍)·김진표(金震彪)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바로 몸을 버리고 임금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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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득운(得運), 호는 명암(明庵). 문정공(文貞公) 김자지(金自知)의 9세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승경(金承慶)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의병 김진영(金震英)의 아우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김진영을 따라서 의병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 의병을 이끌고 수원으로 올라갔다. 수원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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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청(子淸), 호는 월호(月湖). 고려에서 판서를 지낸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의 후손이며, 장사랑(將仕郞) 퇴한재(退閑齋) 김천로(金天老)의 아들이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판윤(判尹) 김경로(金敬老)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집은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폄재(砭齋) 최온(崔薀), 해서(海西) 오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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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김축은 위풍이 당당하였으며 뜻이 고결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전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여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축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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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생. 본관은 김해(金海). 휘는 치삼(致三), 자는 일지(一之), 호는 도연정(道淵亭).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김대장(金大壯)이고, 아버지는 김장이다.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여헌 장현광·미수 허목 등 당시 석학들과 동문 수학하여 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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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도원(道源), 호는 재간당(在澗堂).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이고, 충경공 김익복(金益福)의 아들이다. 김화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천거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이끌고 여산까지 올라갔으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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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인 조경남이 남긴 잡록(雜錄).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열세 살이던 1585년(선조 15)년부터 1637년(인조 15)까지 57년 동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물론이고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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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있는 조선시대에 지은 전통 가옥. 남원의 대표적인 전통가옥은 양반 사대부가 살던 기와집으로 ‘몽심재’(중요민속문화재 제149호), ‘죽산박씨 종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금남재’(전라북도 기념물 제15호), ‘윤영채 가옥’(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이 있고, 서민들이 살던 대표적인 집으로 ‘덕치리 초가’(전라북도 민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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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있는 승전비. 1380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이다. 남원 황산대첩비는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을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글을 새겼다. 비각은 1667년(현종 8)에 현감 허제(許濟)가 건립하였으나 일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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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찌른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勝戰碑)가 있던 자리. 고려 후기에는 왜구가 국경과 변방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는 일이 잦았다. 왜구가 지리산 방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삼도통사 이성계를 보내어 왜구를 토벌케 하였다. 이성계는 의제(義弟) 이두란과 더불어 왜구와 싸워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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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성. 남원시의 북쪽 산곡동 교룡산에 소재한다. 남원 교룡산성은 만인의총에서 용정동 방향으로 광주 대구 고속 도로 굴다리를 지나 500m 정도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다. 지리적 위치는 북위 35° 25´ 35˝, 동경 127° 21´ 35˝이다. 남원 바로 서북쪽의 밀덕봉과 복덕봉 등이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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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향교 건물. 남원향교는1410년(태종 10)에 창건하였다가 1428년(세종 10)에 덕음암 부근으로 옮겼으나, 홍수를 만나 요천이 범람할 때면 유생들이 물을 건너올 수가 없어 통행이 불편하자 1443년(세종 25)에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599년 지방 부호 진사 유인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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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내척동 미동마을에 있는 석불 입상. 내척동 석불입상은 전라북도 남원시 내척 미동마을 소재 오장근의 주택 오른쪽 약 5m 동쪽에 서쪽 방향으로 서 있다. 불상이 서 있는 오른쪽에는 복숭아나무 1그루, 왼쪽에는 감나무, 감나무, 아래로 모과나무가 각 1그루씩 서 있으며, 미륵 앞에 가로 1.85m,세로 2.15m 크기의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배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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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있었던 조선시대 선비 5현(五賢)의 제사와 후학 양성을 위해 설립된 사립 중등 교육 기관. 노봉 서원은 『용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1649년(인조 27)에 처음 창건되었고 1612년(광해군 4)에 재설립한 사립 중등 교육 시설이다. 조선시대 삭녕최씨 일가에서 조성한 서원으로 1698년(숙종 24)에는 국가 사액 서원으로 명명되었다. 그 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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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입부(立夫), 호는 홍재(弘齋). 참판(參判) 노숙동(盧叔同)의 고손자이며, 신고당(信古堂) 노우명(盧友明)의 손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촌 아우인 진사(進士) 노사상(盧士尙)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1,000여 명을 모았다. 팔량치에서 왜적 수십 명을 참살한 후 의병장 김면(金沔)을 좇아 지례(知禮)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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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문중(文仲).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손자이며,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노사심(盧士諗)의 아들이다. 노욱은 1627년(인조 5)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파신하였던 인조가 적들의 포위상태에서 내린 비통한 교서를 보고 분연히 일어났다. 동생인 찰방(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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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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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문신. 노형하는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사하였다. 일찍이 이름과 말이 세상에 알려져 ‘팔미군자(八美君子)’라는 별호가 붙었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장경(長卿). 고려 국자진사(國子進士) 노유(盧裕)의 후손으로, 고조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신고당(信古堂) 노우명(盧友明), 증조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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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부녀자들이 다듬잇돌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앉아 누가 다듬이질을 더 잘하는가를 겨루던 놀이. 마루나 방 등 집안에서 하는 놀이다. 다듬이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다듬잇돌과 방망이 그리고 다듬이질을 하게 될 옷이나 빨래가 있어야 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다듬이질을 하는 것이다. 다듬이질을 하는 동안 장단과 음의 고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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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북도 남원시에서 행해지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건너다니는 놀이. 마을 안이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큰 다리를 주로 이용하며 다리를 밟고 건너는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다리가 약한 어린이나 노인들이 주로 하였다. 다리밟기를 하면 한 해 동안 다리가 아프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든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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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 보름에 달을 가장 먼저 보기 위하여 동산에 올라가 달을 기다리는 풍습. 정월 보름에는 달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초저녁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산이나 뒷산에 올라가 달을 기다렸다. 달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달 봐라”고 외침으로써 자기가 가장 먼저 보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동쪽에 달이 솟아오르면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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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 대보름에 짚으로 집을 짓고 달이 뜨면 그것을 태우던 놀이. 정월 보름 오후에는 청년과 장년들이 짚과 소나무 가지 그리고 나무 가지 등을 준비하고 달이 잘 보이는 곳에 달집을 지었다. 달집은 가능하면 크게 지었으며 달이 뜨는 방향을 향하여 문을 만들어 두어 달빛이 직접 달집 안으로 비췰 수 있도록 하였다. 남원에서는 달집을 ‘망월이’ 또는 ‘만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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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대복사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의 범종. 대복사 동종은 1635년(인조 13)에 조성되었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대복사 동종은 전체 높이 99㎝, 입구의 지름이 58㎝에 달하는 중종(中鐘)으로, 쌍뉴(雙紐)에 상대(上帶)와 하대(下帶), 유곽(乳廓)과 유두(乳頭) 등을 갖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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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어린이들이 대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고 말을 타는 모습을 하면서 노는 놀이. 댓말은 죽마(竹馬)라고도 한다. 대나무가 나는 지역에서 10살 이하의 아이들은 댓말을 타면서 논다. 마당 또는 마을 골목에서 굵은 대나무를 2~3m 정도로 잘라 일렬로 선 아이들이 가랑이 사이에 그것을 넣으면 마치 말을 탄 모습처럼 된다. 맨 앞에 선 아이가 이끌어 가는대로 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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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 있는 덕음암의 불상. 덕음암 석불좌상은 광배(光背)와 몸을 한 장의 돌로 제작하였다. 원형의 두광과 거신광(擧身光)을 조각하였는데, 두광은 2조선으로 조각하였고 그 안에 연꽃을 조각하였으며, 신광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구름문과 같은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크고 길며 낮은 육계를 지녔고 민머리이다. 얼굴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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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이에 돌을 던지면서 싸움을 하던 풍습. 돌싸움은 횃불놀이가 발전하면서 일어난다. 대보름날 저녁 아이들이 횃불놀이를 하다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패배할 기미가 보이면 청년과 장정들이 합세하여 돌을 던져 응원한다. 이것이 발전하면 두 마을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진다. 마을의 남자들이 마을 경계 부근에 모여 하천이나 들판을 사이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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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11월 또는 양력 12월 22일에 드는 절기(節氣)에 지내는 세시풍속.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을 동지라고 한다. 그리고 동지가 포함되어 있는 음력 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한다. 동지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아세(亞歲)’라고도 한다. 동지에 팥죽을 쑤면 먼저 사당과 안방 윗목에 먼저 한 그릇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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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백중날 그해 농사를 잘 지은 집 마당에서 농악단을 초청하여 풍물을 치면서 노는 놀이. 백중은 봄 농사가 마무리 되는 철이다. 이 때가 되면 농사를 많이 한 집에서 농사에 수고한 머슴들을 하루 쉬게 하면서 놀도록 한다. 이것이 마당 밟기이다. 마당 밟기는 원래 부정한 것을 몰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농사를 하면서 수고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성격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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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에서 승려나 불교 신자들이 탑을 돌면서 기원을 하는 것. 사월 초파일에 특히 많이 행해지는 것으로서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남원에서는 만복사 탑돌이가 특히 유명하다. 만복사 탑돌이와 토성밟기의 기원은 만복사가 건립된 고려 문종 때부터라고 전해온다. 「만복사저포기」에 보면 음력 3월 24일에 남원의 젊은 남녀와 지역 주민들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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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인근 토성을 밟으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던 행사. 만복사는 남원부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다. 남원부는 풍수지리에 따르면 행주형(行舟形)이어서 무거운 돌이나 토성을 쌓아야 했기 때문에 만복사를 창건하였다. 만복사 탑돌이와 토성밟기의 기원은 만복사가 건립된 고려 문종 때부터라고 전해오며 토성밟기는 만복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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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초리에 있는 조선 중기 향촌 사회를 근거지로 운영되었던 두 곳의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의 터. 명륜화락당(明倫和樂堂)은 죽산박씨(竹山朴氏) 가문의 박자량에 의해 문중 내의 시설에서 설립한 두 곳의 사립 초등 교육 기관으로 박자량이 직접 훈장을 겸임하였다. 명륜화락당에서는 주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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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중율(仲律).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문치주(文致周)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문형(文炯)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의 중군(中軍)이 되어 남원성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사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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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이술(而述), 호는 초곡(草谷). 관찰사(觀察使) 행촌(杏村) 박자량(朴子良)의 후예로 참의(參議) 박숭조(朴崇祖)의 손자이다. 박계성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예(禮)로써 몸을 다스려 당세에 이름을 떨쳤으며, 관직은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7)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털어 병기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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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절도사(節度使) 박대손(朴大孫)의 후손이며, 밀산군(密山君) 박춘성(朴春成)의 손자이다. 박기수는 힘이 세고 병서를 두루 읽어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7)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형 박흥남(朴興男)과 함께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을 따라 이치(梨峙) 싸움에 나아가 많은 공적을 세웠다. 박기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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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성(密城). 호는 백헌(栢軒). 증조부는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조부는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박이(朴頤), 부는 박경(朴慶)이다. 박기화는 성품이 굳세고 절개가 꿋꿋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학식이 깊었다. 농암(聾庵) 이현보(李賢輔)와 교제하였다. 정유재란을 당하여 남원성이 위험에 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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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옥(仲玉). 송암(松菴)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의 10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된 초곡(草谷) 박계성(朴繼成)의 증손이며, 처사(處士) 박유양(朴惟讓)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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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군극(君極). 부원군(府院君) 박언부(朴彦孚)의 후손이며, 참판(參判)에 증직된 박검종(朴檢宗)의 아들이다. 박세중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용기가 있었으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사(僉使)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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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화(尙和), 시호는 충정(忠靖). 밀성군(密城君) 박언침(朴彦沈)의 고손자이고, 예조참판(禮曹參判) 박광영(朴光榮)의 손자이며. 군수(郡守) 박난(朴蘭)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나성령(羅城令) 이지(李漬)이고, 처부(妻父)는 조언국(趙彦國)이다. 박숭원은 1564년(명종 19)에 문과(별시 병과)에 급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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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부(敬夫).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9촌 조카인 사간(司諫) 박린(朴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고향에 돌아와 벼슬길을 단념하며 살았다. 세상에서는 박유홍과 박린을 ‘일문의 쌍절’이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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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칙(士則). 헌납(獻納) 박증영(朴增榮)의 고손자이며, 이조판서에 증직된 박훈(朴薰)의 증손이다. 박은종은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장(部將)에 이르렀다. 이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적이 하동으로 침입해오자, 장사 300명을 모아 무기를 갖추고 구례 석주(石柱)로 나아가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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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예경(禮卿). 정국공신(靖國功臣) 좌찬성(左贊成) 밀원부원군(密原府院君) 박건(朴楗)의 7세손이고, 진사(進士) 박용현(朴庸賢)의 증손이다. 대동찰방(大同察訪) 박석봉(朴碩鳳)의 손자이며, 훈련부장(訓練部將) 박응사(朴應士)의 아들이다. 아들 박우춘(朴遇春)은 공조좌랑(工曹佐郞)이었고, 손자 박승원(朴昇元)은 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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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익서(翼瑞). 부사(府使) 박호(朴瑚)의 고손자이며, 참봉(參奉) 박인손(朴仁遜)의 아들이다. 박필남은 힘이 좋고 일찍부터 병서에 통달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적병들이 숙성령을 넘어오자, 의병을 거느리고 용추동(龍湫洞)으로 들어갔다. 박필남은 낮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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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석윤(錫胤), 호는 구암(龜巖). 절도사(節度使) 박대손(朴大遜)의 후손이며, 밀양군(密陽君) 박춘성(朴春成)의 손자이다. 박흥남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고 병서에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을 따라 이치(梨峙) 싸움에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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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선유(善由), 호는 삼괴(三槐). 봉사(奉事) 방덕이(房德駬)의 아들이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담양 출신으로 등재되어 있다. 『호남절의록』에는 천계(天啓) 갑술년에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후(虞候)로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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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호는 둔세옹(遯世翁). 아버지는 방덕준(房德峻)이다. 방대순의 아버지는 수족이 저리는 병에 걸려 거의 치료 불가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효자인 그는 수소문 끝에 명의(名醫)를 찾아가 그 증세를 다스릴 수 있는 기술을 배워 마침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옛 예절을 준수하면서 상을 치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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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선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회경. 전적 방원정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아버지 방원정도 문과에 함께 합격하였다. 평소 뜻을 배움에 두고, 옛것을 믿고 행동을 민첩하게 하였다. 효행과 우의를 아울러 다하였는데, 상제(喪祭)에 이르러서는 옛날의 예의를 한결같이 지키고자 하였다. 향리(鄕里)의 크고 작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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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중(興仲), 호는 구일(九一).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며, 좌승지에 증직된 방덕린(房德驎)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자원하여 호위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랑(備邊郞)에 제수되었다. 이후 선전청선전관(宣傳廳宣傳官)을 지내고, 훈련원습독(訓練院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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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반남(潘南). 사인(士人) 방세정(房世挺)의 아내이자, 참판(參判) 박동망(朴東望)의 손녀이다. 방세정의 처 박씨는 혼인한 뒤 몇 개월 되지 않아 남편이 요절(夭折)하였다. 그녀는 손을 가슴에 모은 채 피눈물 속에 하루 밤을 시체를 끌어안고, 음식 한 점을 입에 넣지 않고 죽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다가 목을 매어 죽고자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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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후잠(后潛), 호는 만회(晩悔).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수찬(修撰) 방귀온(方貴溫)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참판에 증직된 방덕유(房德騟)의 아들이다. 방원량은 조찬한(趙讚韓)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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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겸(仲謙).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이고,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며, 방덕화(房德驊)의 아들이다. 방원익은 관직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624년(인조 2)의 이괄의 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형 방원진(房元辰)과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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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정(而淨), 호는 지족와(知足窩).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7세손으로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수찬(修撰) 방귀온(房貴溫)의 증손이며,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다. 방원정은 해서(海西) 오정길(吳廷吉)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行誼)로 이름을 떨쳤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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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성(而省), 호는 만오(晩悟). 현감(縣監) 방구성(房九成)의 후손이며,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의 손자이다. 방원진은 오정길(吳廷吉)·장경세(張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16세의 나이로 양대박(梁大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아버지 상을 당하여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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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났던 방응언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다. 방응언은 난이 끝난 뒤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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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생.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준부(俊夫), 호는 사계(沙溪). 할아버지는 호조좌랑 방귀화(房貴和)이고 아버지는 방한걸(房漢傑)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방원진(房元震)이 손자이다. 일찍이 조식(曺植)·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다.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사계천 위에 집을 짓고 송시(誦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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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극지(克智), 호는 하천(下川). 직제학 방사량(房士良)의 후손이며, 방덕일(房德馹)의 아들이다. 방처인은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천거로 참봉(參奉)과 수령(守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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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남원시 신내면 금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실상사 백장암에서 사용된 청동에 은사(銀絲)를 넣어 만든 향로(香爐). 절에서는 통상적으로 조석 예불(朝夕禮佛)과 사시예불(巳時禮佛) 때에, 그리고 불공을 드릴 때,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의미로 부처님 전(前)에 향을 올려 피우는데, 이때 사용되는 기구가 향로로 향완(香椀)이라고도 한다. 향완은 밥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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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17세에 오익한의 첩이 되었는데, 결혼 후 남편이 병을 얻게 되자 그녀는 지성을 다하여 병을 구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남편이 죽자 시체를 끌어안고 3일 밤낮을 지냈으며, 복상 3년을 하는 동안 내내 울부짖었다. 남편의 적자(嫡子)를 사랑으로 길렀으며 남편이 살아있을 때처럼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대하였다. 주위에서는 나이가 어려서 혼자 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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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원 출신의 임진왜란 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 邊處厚)의 5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 도탄(桃灘)에 살았으므로 도탄선생이라 칭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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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면천(沔川). 자는 시경(時慶), 호는 고남(高南).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의 후손이며, 구암(久菴) 복한(卜僩)의 6세손이다. 후손들은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에 세거하고 있다. 복응길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 조헌(趙憲)의 종사관이 되어 금산으로 달려가서 중봉과 함께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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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장례식에 앞서 상가에서 빈 상여를 둘러매고 장례식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 호상인 경우 마을의 청장년 남자들은 상가에서 빈상여놀이를 한다. 상두꾼들이 빈상여를 매고 상두꾼 소리를 하면서 상가의 마당에서 놀면 상가에서는 술과 음식으로 대접을 한다. 빈상여 놀이는 상가에서 흥을 돋움으로써 상주와 유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상여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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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남양 방씨의 선조 방응현(房應賢)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옆에 흐르는 냇물을 모래내라고 한다. 사계(沙溪)[모래내]는 이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다. 방응현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으면서 일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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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삼재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설날에 하는 풍습. 삼재는 수재, 화재, 풍재를 말하기도 하고, 병난, 질역, 기근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유독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나는 해는 ‘삼재가 들었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삼재는 12간지에 의해 출생년에 따라 정해지므로 사람마다 삼재가 드는 해는 다르다. 삼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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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3월 3일에 지내는 명절. 중삼일(重三日)이라고도 한다. 삼짇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한다. 이는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삼짇날은 봄을 맞이하는 축제일이기도 하였다. 제비는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사람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삼짇날 제비를 보면 공손하게 손을 합장하고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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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에서 삼동굿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당산제를 지낸 이후 샘에서 지내는 굿. 괴양리는 양촌, 음촌, 개신이라는 세 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백중이 되면 삼동굿놀이를 한다. 삼동굿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당산제를 지내게 된다. 당산제는 유교식으로 지내지만 당산제 이후 농악대를 앞세우고 양촌마을의 공동샘으로 가서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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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사설 초등 교육기관. 서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마을마다 설치되어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당의 기원은 멀리는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크게 번창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서당은 처음에는 양반 가문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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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서곡리 서동마을에 있던 서당. 서당리서당의 정확한 설립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되어 지역 유지들이 함께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설립 연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곳을 서당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광유씨의 재실(齋室)에서 학동을 가르쳤는데, 광복 후인 1950년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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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시의 열녀. 수지방(水旨坊) 서득수(徐得水)의 아내이다. 남편이 큰 풍창을 얻어 사람들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나 산골짜기에서 여러 해 동안 막(幕) 가운데서 살았다. 그러는 동안 한번도 남편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고, 지성으로 남편의 병을 구완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죽게 되자 그녀는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주었으나 끝내는 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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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사학 위주의 학문 기관. 서원은 최초 중국 당나라 궁중에 설치된 집현전 서원(서재)을 모태로 한 사학(私學)으로 출발한 학문연구 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부터 국가의 학문 중추기관으로 운영되면서부터는, 관학기관(성균관, 향교)의 부진과 학문적 고착화를 극복하는 향촌 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전국에서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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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승려. 속성은 이씨,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백암(柏庵). 이강의 아들이다. 성총은 13세인 1646년(인조 24)에 출가하여 전라북도 순창군 취암사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648년(인조 26)에 방장산으로 들어가 9년 동안 수초(守初) 취미(翠微)에게서 불경을 배웠다. 이후 송광사·징광사·쌍계사 등을 유력하면서 후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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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소병표는 어려서부터 조숙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항상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대접하였으며, 철마다 서늘한 옷과 따뜻한 옷으로 항상 갈아 입혀드리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늘 자리를 지키면서 밤낮으로 구환하였으며, 대소변을 맛보면서 간병하였다. 그리고 뒷간의 수발이며 옷 빨래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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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경(會卿), 호는 만각재(晩覺齋). 칠도병사 소후(蘇後)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생원 소산복이다. 소설의 아버지 소산복은 임진왜란 때에 김천일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서 서울을 복구하여 임금을 서울로 모셔오려고 하는 계책을 세웠는데 중도에서 병을 얻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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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경즙(景楫), 호는 적은(迪隱)이다. 상호군 소희철(蘇希哲)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소인세(蘇仁世)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유만달(柳晩達)의 딸이다. 소제는 성품이 충직하고 성실하였으며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세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형 소황(蘇滉)과 함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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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호원(浩遠), 호는 이촌(李村). 고려의 금오위 상호군 소희철의 후손이며, 7도병사를 지낸 소후(蘇後)의 7세손이다. 병마절도사 소기동의 고손자이며, 군자감정 소인세(蘇仁世)의 아들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주부 소제(蘇濟)의 동생이기도 하다. 소호는 지극한 효성심을 가지고 부모를 섬겼다. 부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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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도암(島岩). 상호군 소희철(蘇希哲)의 후손이며, 현감 소연(蘇沿)의 6세손이다. 소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소제(蘇濟)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 100석을 모아서 관에 보냈다.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그 공을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해줄 것을 청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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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옥(汝玉), 호는 모와(慕窩). 문성공 회헌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안호덕의 아들이다. 안건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자 9년간 시묘를 살았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흥발(李興發)의 격문에 발하여 가산을 털어 군량과 병장기를 갖추고,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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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이회(而會), 호는 풍계(楓溪). 문성공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풍와(楓窩) 안신손(安信孫)과는 오촌 간이다. 안경달은 문음(門蔭)으로 주부를 제수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기암 정홍명과 운암 이흥발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서, 과천에 이르러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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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안대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9살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큰아들 안사오(安嗣吳)와 함께 권율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다가 여원치(女院峙)에서 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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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원(汝源), 호는 청류재(聽流齋)이다.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안대중(安大重)이다. 안사제는 효성이 지극하고 강직하며 굳센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1582년(선조 15)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아버지와 형이 어차산(於差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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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후원(厚源), 호는 풍와(楓窩).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안벽(安璧)이다. 안신손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주부(注簿)를 역임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부에서 군사와 군량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의 이칭) 이복남에게 달려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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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호는 청계(淸溪). 증조할아버지는 기묘명현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이며 아버지는 사과(司果) 안선국(安善國)이다. 남원의 금릉리에서 태어났다. 안영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원의 본가에 있었는데 당시 모친은 서울의 집에 있었다. 난을 만나서 서로 찾지를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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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홍문관교리 안구의 7세손이다. 안용은 행실이 돈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게는 우애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옥과현감 이흥발 및 여러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아 청주로 달려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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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아호(雅號)는 국포(菊圃). 청백리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8세손이다. 안우는 효자 집안의 후손으로 그 또한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19살 때 부친이 돌아가자 상례(喪禮)에 따라 정성을 다해 장사를 치렀다. 그 뒤 모친이 병환으로 누워 있으면서 별미(別味)를 원하자 지성으로 이를 구해다 주었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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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문보(文寶), 호는 죽암(竹巖). 사재당(思齋堂) 안처순의 아들이다. 안전은 문장(文章)과 행실(行實)이 뛰어났으나 과거 공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덕성을 숨기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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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군보(君寶), 호는 모암(慕庵). 문성공 안향(安珦)의 14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안황(安璜)이고 아버지는 처사 안경덕(安敬德)이다. 안진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안황(安璜)에게 유학을 수업하여 아우 안건(安楗)과 함께 『가례(家禮)』·『소학(小學)』·『심경(心經)』·『성리(性理)』 등의 책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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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 사재당(思齋堂). 그의 증조는 안구(安玖)이며, 조부는 전주부윤(全州府尹) 안지귀(安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안기(安璣)이다.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玉山)의 딸이다. 안처순은 1513년(중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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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성로(星老), 호는 귀은(歸隱). 사간공 안성의 7세손이며 청백리로 칭송받던 대사간 안팽명의 5세손이고 을사명현 안경우의 현손이며 현감 안극충의 손자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피난해 있던 남한산성마저 포위당하자 충의로운 선비들이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철수도 비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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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함(季涵). 문성공 안향(安珦)의 13대손이다. 고조부는 장수현감을 지낸 안처경(安處經)이며 증조부는 장사랑 안창(安瑒)이며 조부는 안광업(安光業)이다. 생부는 진사 안황(安璜), 양부는 진사 안혼(安琿)이다. 생외조는 진사 조대성(趙大成), 양외조는 직장 문창후(文昌後)이며 처부는 사과 유언(柳堰)이다. 아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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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고조부는 홍문관교리 이적(李迪)이며 아버지는 이영진(李榮震),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남편은 순흥안씨 안국로의 아들인 안희도(安希道)이다. 이씨 부인은 규방의 규수로서 예의범절과 몸가짐이 정숙하였으며 19세에 결혼하여 부모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남편에게는 공경으로서 아내의 도리를 다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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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이자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寥汀)·태암(泰巖). 아버지는 충장공 양대박(梁大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양대박이 창의하자,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아버지를 보필하였다. 양경우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고경명(高敬命)에게 갔는데, 고경명은 양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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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靑溪)·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 아버지는 목사 양의(梁艤)이다. 양대박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다. 1572년(선조 5)에는 학관(學官)에서 제술관(製述官)으로 기용되고 이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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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언(景彦). 아버지는 참봉 양희보(梁希寶)이다. 양대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족인(族人) 양경우와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로 달려갔다. 그러나 고경명은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집으로 보내니, 양대수는 눈물을 흘리며 그 뜻을 시로 짓고 물러나와 노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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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녀. 아버지는 첨지(僉知) 진재창(陳再昌)이다. 양여형(楊汝亨)의 아내 진씨(陳氏)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한번도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결혼해서는 시댁에 의지하지 않았다. 본가에서 살면서 부모의 상을 당했던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죽만 먹는 등, 그의 오빠 진극서(陳克緖)와 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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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백형(伯亨). 영의정 양운(梁運)의 후손이며 참봉 양대충(梁大冲)의 아들이다. 행의로 천거되어 찰방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양덕현감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을 따라서 금산으로 나아가 병사들의 앞에 서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금산전투의 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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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간숙(幹叔), 호는 농암(聾庵). 병부낭중 양능양(梁能讓)의 후손이다. 양진번은 남원 괴정에서 출생하여 김화(金樺)의 문하에서 배우고 정온(鄭蘊)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운암 이흥발 등 여러 선비들과 함께 창의하여 과천에 이르러서 적병을 많이 죽였다. 얼마 후 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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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양진원의 아내 윤씨는 남편의 상을 당하자 3개월 동안 그 시신을 부둥켜안고 지냈다. 또한 삼년상을 치르면서 날마다 통곡하는 그녀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함께 울었다고 한다. 윤씨의 열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의 특전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확한 명정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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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양치민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용성지(龍城誌)』권6 효자편에 기록되어 있음은 그의 효행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용성지(龍城誌)』에 의하면, 그는 평소 온 정성을 다하여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드시게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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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발(子發), 호는 동애(東崖). 용성군 양주운(梁朱雲)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집의 양의(梁艤)이고, 아버지는 청계 양대박(梁大撲)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 양대박이 의병을 일으켜 출전하자, 19세의 나이에 불과하였으나 종군하여 운암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 36)에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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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길부(吉夫), 호는 모정(慕亭).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의 후손이며 둔재 양사(楊泗)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팽로·양대박 등과 함께 고경명을 찾아가서 창의하였다. 그들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담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양희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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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일(汝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부역으로 노역을 나갔다가 한산섬의 싸움에서 크게 공훈을 세우므로 조정에서 특명으로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한산섬의 싸움에서 쌓은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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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종지, 호는 의헌. 이조참판 오극제의 5세손이며 봉사 오수명의 손자이자 첨정 오정무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서 재종숙인 오정식을 따라 곧바로 의병소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사종제인 오상지·오상우와 사종손인 오찬도 등과 동맹하여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이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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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남편 오여격(吳汝格)이 죽자 시체를 끌어안고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같은 날 자결하기로 한 것은 나의 본마음이지만 나에게 자녀가 없는데 누가 시체를 염(殮)할 것이며 장례를 치루겠습니까?”하였다. 그녀는 죽만 3년 동안 먹고 겨우 연명(延命)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제(祭)를 정성으로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다. 복제(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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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보국(補國), 호는 청세정(淸洗亭). 문충공 오효순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찬성 오협종이다.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오연경은 성품이 우아하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자라서는 학문에 힘써 경서와 사기를 두루 익히어 큰 뜻을 통달했다. 1600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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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현(仲顯), 호는 설강(雪岡). 고조부는 이조참판 오극제(吳克悌)이며, 할아버지는 참봉 오몽인(吳夢仁)이며, 아버지는 참봉 오기복(吳麒福)이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형 오흥업과 함께 참여하였다. 왜적에 의해 남원성이 겹겹이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아버지 오기복의 허락을 받아 수십 명의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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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남편은 사인(士人) 오윤제(吳允濟)이다. 고씨는 시어머니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남편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였다. 일에 처해서는 유순(柔順)으로 정대(正大)하게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불을 때지 않았으며 뼈를 세워 아침저녁으로 제(祭)를 예를 갖추어 정성으로 하였다. 그녀는 항상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죽을 때까지 흰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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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술(子述). 금남재 오응(吳凝)의 5세손이며, 영의정 오찬조(吳纘祖)의 아우이다. 무술에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형인 오찬조를 따라서 숙성령으로 나아가 적병의 동정을 살피고 적병 수십 명을 베었다. 승세를 몰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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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원당(翫元堂). 현감 오하몽(吳下蒙)의 아들이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한 후 비변랑, 사헌부감찰, 형조정랑을 거쳐 1579년 군기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83년 이이(李珥)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동인들의 미움을 사 흥덕현감으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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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첨(爾瞻), 호는 나진(懶眞). 이조참판 오극제의 현손이며 참봉 오구정의 증손이자 복재 오수성의 아들이고 오정길의 아우이다. 오정식은 광해군 때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재종질 오망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여산의 모의소로 달려갔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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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함양. 자는 중술(仲述), 호는 영회정. 금남재 오응의 5세손이다. 무술이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동관을 굳게 지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했을 때, 그는 남원중군으로 숙성령의 싸움에서 많은 적병을 참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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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현(伯顯). 할아버지는 참봉 오몽인(吳夢仁)이고 아버지는 참봉 오기복(吳麒福)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錦山金氏)로 김성원(金聲遠)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성 안에서 군량 보급을 맡으며 접반사 정기원 등과 힘을 합하여 성을 지켰다. 틈을 내어 집으로 돌아가서 늙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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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조선 중기 가마터. 왕정동 도요지의 가마터의 범위는 남북으로 50m 정도이고, 주변에 가마와 관련된 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정동 도요지는 만복사지 바로 뒤편에 위치하며, 해발 190m 정도의 기린봉에서 흘러내린 남쪽 능선의 단부에 해당한다. 즉 만복사지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150m 정도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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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섣달 그믐이나 정초에 악귀를 쫓아 재앙을 막고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기 위하여 행하던 놀이. 용마희란 이름은 남원의 옛 이름이 용성(龍城)인데서 유래하였다. 남원시에서는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주민을 남과 북으로 나누고 각각 용을 만들었다. 두 편은 각각 용마를 오색으로 칠한 뒤 외바퀴 수레에 실어 거리로 나온다. 거리에서는 여러 가지 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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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문희공 우탁(禹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안민(禹安敏)이다.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담력이 있어서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수문장으로 있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선조가 있는 곳으로 가던 중 도중에서 적을 만나 싸워 많은 적을 죽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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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원주. 호는 창암(蒼菴). 녹야당(綠野堂) 원계관(元繼寬)의 손자이다. 선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의 자리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사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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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공직(公直). 곤산군 유익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유사온(柳思溫)이다.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여 무과에 급제한 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서 인조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인조에게 적을 막아낼 여러 가지 계책을 올리어, 난이 끝난 뒤에 벼슬이 포도대장에 이르렀다. 그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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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유(子有), 호는 사호(沙湖). 청백리로 칭송받던 낙봉(駱峯) 유헌(柳軒)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유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유영립(柳永立)이다. 1595년(선조 28)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뽑혔다가 호당이 되었다. 광해조 때 삼강오륜의 질서가 무너지자 벼슬을 버리고 남원의 추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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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생. 본관은 문화(文化). 호(號)는 뇌천(磊川). 할아버지는 석헌(石軒) 유옥(柳沃)이고, 아버지는 유홍원(柳洪源)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이다. 평생을 안빈낙도하면서 입신 출세를 구하지 않았다. 『뇌천집(磊川集)』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덕행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드날렸지만 병자호란이란 국가적 치욕을 당하면서 벼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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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문(景文). 남원백 윤위(尹威)의 후손으로, 문효공(文孝公) 윤효손(尹孝孫)의 4대손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봉사로 있던 종질 윤정기(尹廷璣)와 역시 종질인 윤정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제봉 고경명의 격문을 보고, 그때까지 모았던 장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고경명 부대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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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별장 형태의 가옥. 윤영채 가옥은 일명 이언 동대로 불린다. 이언 동대는 1511년 조선 중기 남원도호부 내의 48방 중의 하나인 이언방에 세워진 관청 건물이다. ‘口’자형 평면 건물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남원부사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하여 ‘제2의 동헌(東軒)’으로도 불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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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명서(明瑞). 남원백(南原伯) 윤위(尹威)의 후손으로, 문경공(文景公) 윤신갑(尹莘甲)의 7세손이다. 힘이 세고 병서에 통달하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용만으로 몽진을 하게 되자, 형인 윤응인과 함께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올라가는 도중 웅치 부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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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헌보(獻寶). 남원백(南原伯) 윤위(尹威)의 후손이며, 문효공(文孝公) 윤효손(尹孝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군수 윤대이(尹大頤)이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남원부에 머물던 명나라 군사들이 군량이 모자라 곤란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당숙인 윤대표와 종형 윤정반과 함께 집안 살림을 털어서 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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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통시대에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선 민간인. 의병이란 순수한 민간인 신분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에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가리지 않고 의를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선 의용병이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에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말 의병은 항일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남원 출신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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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생.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노(仲魯), 호는 후천(後川). 용성정(龍城正) 이열(李悅)의 아들이다.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大新里) 상신마을은 영해군 이경여(李景輿)가 정착한 곳으로, 전주이씨 영해군파의 집성촌이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준수하였고, 도량이 넓고 호방하였으며, 말주변이 훌륭하여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고금을 널리 살펴보아 때에 힘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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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장(德章), 호는 내성재(內省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금헌(琴軒) 이대윤(李大胤)이고, 아버지는 판서에 증직된 이엽이며, 형은 춘파(春坡) 이유형(李惟馨)이다. 지금의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광해조 때인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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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술(景述), 호는 금헌(禁軒), 또는 만휴당(晩休堂).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승지 이혼(李渾)이다. 지금의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랑으로 있었으나 명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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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 삼동리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7년(선조 30)에 남원부판관이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정유재란으로 왜군의 재침이 더욱 성하자, 관청에 비축해 둔 재물을 처분하여 소와 술을 사서 모든 장졸들을 배부르게 먹인 다음 남원성을 사수할 계책을 세웠다. 그해 8월 12일경 남원성이 11만여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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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는 성칙(聖則), 호는 풍거(風渠).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정(春城正) 이담손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국형(李國馨)이다.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가 외할아버지이며, 배위는 경주김씨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외모가 위연하였으며, 배운 것이 넓고 듣는 것이 많았다. 규율에 맞는 행동을 하였으며, 청렴하고 검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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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원(子遠), 호는 석동(石洞).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천묵재(天黙齋) 이상형(李尙馨)이다. 남원부 둔덕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동정에 절도가 있고 스스로 학문에 힘써 문사(文詞)만을 일삼지 않았어도 문장이 날로 이루어지니 선배들의 기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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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원(聞遠), 호는 파곡(坡谷).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후손이다.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전라도의 제현들과 창의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을 거두었다. 여산(礪山)에서 집합하여 청주를 지나 서울로 올라가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비분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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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수부. 조선의 개국공신 이의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병서를 익힌 뒤에 일평생 몸을 조국에 바쳐 순국하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매일 장순(張巡)과 악비(岳飛), 문천상(文天祥)의 전기를 읽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에 나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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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효자로 이름났던 이중엽(李重曄)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익번이다. 이부춘은 천성이 착하고 가문의 전통으로 효심이 뛰어났다. 13세에 전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결혼한 지 3일 만에 이씨 부인이 물을 길어 밥을 짓자 태연하게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내를 데리고 처가로 갔다. 장인과 장모가 반갑게 사위를 맞이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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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견(景見), 호는 만은(灣隱). 할아버지는 영상 이준경(李浚慶)이고, 아버지는 도승지 이덕열(李德悅)이다. 1633년(인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집으로 돌아와서 학문에 정진했다. 형인 이사성(李士星)과 함께 남원시 주포(周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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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괴정(槐亭).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이덕열(李德悅)이다. 인조조에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중형인 이사영과 이흥발, 유즙, 최온 등 당시의 호남 지도자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과천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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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효자 이부춘(李富春)의 자손이다. 이상규는 8세 때 이웃에 사는 당숙 댁에 갔는데 당숙모가 참외를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당숙모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직 금년에 참외를 잡수시지 않았는데 어찌 제가 먼저 먹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랄수록 효심이 더욱 지극해졌는데, 서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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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석명(李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이희선(李喜善)이다. 1583년(선조 1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좌랑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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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黙齋).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군 이담손(李聃孫)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욱(李昱)이며, 어머니는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1628년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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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오산(烏山). 병조판서를 증직받은 이성임(李聖任)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식 높은 선비로 알려졌다. 35세 때 부친의 초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마시면서 상을 마쳤다. 병자호란 때 창의하였으며, 74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예절대로 3년간 시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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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명나라 장수. 어려서부터 군에 종사하던 역전의 용사로서 곤봉의 명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중군으로 남원성 동문을 지키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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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죽암(竹庵).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송탄(松灘) 이점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성균관의 여러 벗이 재장으로 추대할 만큼 학식과 인품이 돋보였다. 만년에는 초야에 집을 지어 ‘죽암’이라고 편액을 걸고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 힘썼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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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무성(茂城). 자는 청보(淸甫). 부사 이서(李瑞)의 손자이며 군수 이희방(李希芳)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을 쫓아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금산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훈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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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보(德甫), 호는 춘파(春坡).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금헌(琴軒) 이대윤(李大胤)이고, 아버지는 판서에 증직된 이엽으로, 지금의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활계 이대유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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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菴). 감사를 지낸 이감(李堪)의 손자이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음직으로 관계에 들어가 참봉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퇴사암(退思菴)이라고 호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며 세월을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에서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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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방로(邦老). 홍문관교리 이척의 증손이며, 한성우윤 이광업(李光業)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같은 고을의 정치·이유형·김원중 등과 함께 창의하여 과천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돌아왔다. 그후 영달에의 뜻을 끊은 채 산중에서 남은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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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연거사(紅蓮居士). 아버지는 홍문관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황효헌과 이연경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음을 당한 갑자사화 때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1522년(중종 17)에 생원, 1531년(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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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고려 때 효행이 깊고 정치가로도 이름이 높았던 영천부원군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이며, 이승언의 맏아들이다. 이중엽은 용모가 단정하고 효심이 극진하여 학문을 즐겼는데, 이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남원양씨에게서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부모가 먹고자 하는 음식이나 일용품이 있으면 무엇이거나 좋은 것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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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양성(陽城). 아버지는 이팽년(李彭年)이다. 아우 이경신(李敬信)은 훈련판관(訓鍊判官)으로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전함을 수리하고 공로가 많았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간성군수로 의병을 모아 충주 달천(達川)에서 신립(申砬)과 함께 싸우다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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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원(淸遠), 호는 죽암(竹巖). 도평군 이말생의 후손이며, 파곡 이복의 아우이다. 이함은 13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의병을 모아 싸움터에 나가려 하니 그의 아버지 참판공이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고 말려서 그만두었다. 그 후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여러 의병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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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이능간(李凌幹)을 시조로 하는 영천이씨는 전라북도 영천(寧川)에서 대대로 살았으며, 집성촌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전라북도 남원군 주천면 용담리,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등이 있다. 『용성지(龍城誌)』에는 이형길(李亨吉)이 고려 시중 송헌(松軒) 이능간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형길은 『용성지(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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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회중(晦仲), 호는 회산(晦山). 세종의 왕자 영해군 당의 5세손이며, 구성의 수령을 지낸 이성의 손자이다. 돈용교위(敦勇校尉) 이경하의 아들이다. 이휘는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고 남달리 용기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잘하여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1611년(광해군 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성진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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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이흥표(李興標)는 『용성지(龍城誌)』 6권 효자조에 나오는 인물로, 군수(郡守) 이성임(李聖任)의 손자이다. 이흥표는 효도와 우애에 마음을 쏟으며 그 밖의 일에는 문 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았다. 그의 형이 어머니를 봉양하며 5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이흥표는 신혼정성(晨昏定省)을 다하여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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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이선(而善). 대사간(大司諫) 검재 이감의 현손자이며,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이조참판을 증직(贈職)으로 받은 이윤의 손자이다.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 이천행(李天行)의 아들이다. 이희는 가법을 이어받아 행실이 바르고 출중하였으며, 육촌 형인 충장공(忠壯公) 이흘을 본받아 섬기며, 어려움이 닥치면 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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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이희량은 조선 중기 선조 대부터 인조 대에 활약한 무신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영교위를 거쳐 선전관, 절충장군(折衝將軍), 덕만보권관(德萬堡權官)에 제수되었다. 그는 말년에는 운봉(雲峰)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본관은 영천(寧川), 자는 형재(馨哉), 호는 대명거사(大明居士)이다. 시중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이며,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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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임규는 자질이 특출했으며, 벼슬이 사용(司勇)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임현의 막하에서 함께 싸우다가 남원성이 무너질 때 순절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 싸움에서 순절한 임규에게 초혼장(招魂葬)으로 장사를 지냈고, 정려(旌閭)를 내려 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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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사용(司勇) 임규(林圭)의 손자이다. 임대유는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금남 정충신의 의병에 들어가 반란군을 많이 참획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서윤(庶尹)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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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조양(兆陽).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국헌(菊軒). 아버지는 곡성훈도 임사강(林士綱)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이조참판을 지낸 고순(高淳)의 딸이다. 임옥산(林玉山)은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5년 후 무과에 급제했다. 군기감직장에 재임 중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하여 사직한 뒤에는 어머니의 분뇨를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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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사촌(沙村) 장경세(張經世)[1547~1615]는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주로 활약했던 문신이자 학자이다. 전라도도사, 금구현령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 유폐, 영창대군 살해 등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사직하였다.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사회 현실과 우국지정을 읊은 문학 작품을 남겨 문명(文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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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사중(思中), 호는 율계(栗渓). 아버지는 경력(経歴) 장응규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장급(張伋)[1522~1589]은 품성이 뛰어나고 대의(大義)를 중시해 불의(不義)를 보면 그 자리에서 문책하였다고 한다. 1558년(명종 13) 아버지가 죽자 서울에서 남원까지 운구하고 여묘(廬墓) 3년 동안 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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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군언(君彦). 참봉(參奉) 장부실의 손자이며, 호군(護軍) 장원상(張原祥)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군이 남원을 포위하자, 군량을 운송해올 길이 사방으로 막히고 말았다. 이때 장덕량은 콩 10섬을 명나라 장군에게 보내어 군마의 먹이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싸움터에 나아간 장덕량은 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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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인. 본관은 흥성. 자(字)는 익재(益哉), 호(號)는 옥경헌(玉鏡軒). 아버지 장담(張膽)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1617년 11월 23일 태어났다. 장복겸은 관직에 나가 명예를 얻고 치부를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일생 동안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가 견문(見聞)했던 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어 노래하고 친한 벗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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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호이(浩而), 호는 낙와(樂窩) 또는 독락와(獨樂窩)이다. 참판에 증직(贈職)된 장우익(張宇翼)의 아들이다. 장석은 문학에 뜻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고모부인 통제사 이석관(李碩寬)으로부터 무술을 익혔다. 1714년(숙종 40)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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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자량(子良), 호는 망북정(望北亭). 장성현감 장환의 아들이다. 장익한은 타고난 성품이 재주가 있고 민첩하였으며, 충의와 절개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엄격한 가르침을 받아서 의리가 돈독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겨우 14세였는데,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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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명원(明遠), 호는 풍암(楓庵). 고려 안경공 장연우의 후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장진세(張震世)의 아들이다. 장제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 형 용계공 장환, 사촌 아우 용암공 장선, 6촌 장지 등과 함께 곧장 남한산성으로 달려가서 임금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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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유신(幼新), 호는 용계(龍溪). 고려 태사 충헌공 장길(張吉)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장숙(張叔), 아버지는 공조판서 장승세(張升世)이다.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장사랑 김승업(金承業)의 딸이다. 장환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충효를 인륜의 으뜸으로 알았다. 그는 1612년(광해군 4)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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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서산(瑞山). 시조는 송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郎)을 지낸 정신보(鄭臣保)로, 송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하여 충청남도 서산시에 정착했으며, 현재 서산시 송곡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운성지(雲城志)』 「인물지(人物志)」 효자(孝子) 편에 ‘정규룡(鄭圭竜)은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 할머니의 초상을 당했을 때 슬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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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하동(河東). 한림 정임(鄭霖)의 7세손이다. 정기남은 1592년(선조 25)에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에 서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다. 선조의 어가(御駕)가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감찰이 되었으며, 내금위장, 별군직 등을 역임하였다. 김해부사(金海府使)·부령부사(副寧府使)·창성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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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성(應聖)이고, 익혜공 정난종(鄭蘭宗)의 후예이며, 참봉 정대훈(鄭大勳)의 아들이다. 정기수는 힘이 세고 기개가 있었으며, 1574년(선조 7)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다. 그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그의 6촌 아우인 정지심·정지우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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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고려시대의 좌복야 정목(鄭穆)의 후손이며,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고손자, 현령 정한용(鄭漢龍)의 증손자, 사직서령 정순복(鄭純福)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내산부원군 정상신(鄭象信),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영천부정 이경(李璟)의 딸이다. 정기원은 24세가 되던 해 진사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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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인헌(仁憲). 시중(侍中) 정현영의 후손이며, 참판 정염팔(鄭廉八)의 아들이다. 정덕승은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호군이던 그는 성만 최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위해갔다. 적병의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남한산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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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회가(晦可), 호는 간송(澗松). 도제조 무안군 정남만의 후손이며, 정산택(丁山澤)의 아들이다. 정사달은 효성이 지극하고 문행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정사진과 함께 조경남과 김완을 따라 궁장동으로 들어가서 많은 왜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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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사인(士人) 정세창(鄭世昌)의 아내이며, 의병이자 효자였던 노사예(盧士豫)의 손녀이다. 정세창의 처는 노씨(盧氏) 가문의 예절을 모두 익혀 정씨가(鄭氏家)로 시집간 뒤에는 더욱 부도(婦道)에 힘썼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남편을 섬기는 데 예(禮)를 다하였다. 남편이 3년 동안 고질병(痼疾病)을 앓자 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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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했던 문신. 정염은 1524년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월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는 당대의 석학 미암(眉岩) 유희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것이다. 성리의 바른 학문을 공부하였고, 규암 송인수와도 교유하였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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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단종의 충신인 정흥덕의 7세손이며, 감찰 정훈(鄭勳)의 아들이다. 정원형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예의범절을 잘 지켰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모의청에 가서 종사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국왕이 남한산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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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중(明仲), 호는 죽재(竹齋). 병조판서와 세자빈객을 역임하고, 단종의 충신인 정흥덕의 7세손이며, 감찰 정훈(鄭勳)의 아들이다. 정원훤은 효우가 돈독하고 옛 법도를 잘 지켰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아버지의 명으로 형 정원형(鄭元炯)과 함께 군량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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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정월 15일에 지내는 명절. 정월대보름은 상원일이라고도 하며 설 다음에 오는 큰 명절로 인식되어 있다. 대보름이라고 하는 것은 정월에 보름달의 크기가 일년 중 가장 크기 때문이다. 정월대보름에는 다양한 민속놀이가 실시되며 특히 저녁에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달맞이 하는 풍습이 특징이다. 남원의 정월대보름 행사도 전국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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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정이길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경상도 초계 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이 때 왜적이 고을까지 침입해오자 그들과 싸워 크게 이겼다. 고을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뒤에 호종관과 병사를 지냈으나 후손이 단절되어 자세한 내용은 전해오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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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좌(仁佐). 좌리공신으로 영상에 증직(贈職)된 익혜공 정난종의 6세손이며, 남대장령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정광보의 5세손이고, 지례현감 정홍(鄭泓)의 아들이다. 정지번은 1579년(선조 12)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충효의 도리를 익혔으며 재주와 절개가 뛰어나 사우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음직(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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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공실(公實), 호는 국담(菊潭). 청백리로 알려졌던 정명의의 6세손이며 만헌 정염의 손자이다. 정치는 1588년(선조 21)에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1627년(이조 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며, 성균관 사우들이 그를 추종하였다. 1636년(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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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 효자 정개(丁塏)의 작은 아들 정탁(丁鐸)의 아내이다. 최씨 부인은 시부모님을 섬김에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였으며 남편에 대해서도 양순하고 극진히 섬겨, 마을에서 그녀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이 일찍 죽자, 하루 밤 가슴을 치며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먹지도 않고 방에 불을 때지도 않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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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 아버지는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정세명(丁世明)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전적(承文院典籍)이 되었다. 성균관전적·호조좌랑을 거쳐 1537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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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시호는 충간(忠簡). 아버지는 필산감역(匹山監役) 정세명(丁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정황은 1536년(중종 31)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지평·병조정랑·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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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남원 출신의 문인. 수남방옹(水南放翁) 정훈(鄭勳)[1563~1640]은 조선 중기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주로 활동했던 문인이다.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모친을 모시고 남원으로 피란하였다가 그곳에 우거하며 생을 마쳤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방로(邦老), 호는 수남방옹(水南放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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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 사재정(司宰正) 조석기(趙碩基)의 아내이다. 허씨는 부모와 시부모를 함께 모셨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를 하였다. 남편이 두질(痘疾)로 죽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자녀가 어리고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어 죽지 못하였다. 그녀는 오직 제사 때에만 차와 반찬 한 숟가락만 먹을 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리하여 육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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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역사. 현재의 남원은 조선시대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이 통합된 것이다. 남원부는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바뀌었으며, 운봉현은 남원부의 속현으로 있다가 조선 건국 후인 1392년(태조 원년)에 독립되었다. 이후 남원도호부는 1739년(영조 15) 양찬규(梁纘揆)의 반란으로 인하여 일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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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김제(金堤). 문량공 조간(趙簡)의 후손이며, 사성 조충손(趙忠孫)의 손자이다. 조억령은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았고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역임했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적병이 장수(長水)의 육십령재[六十嶺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노비와 군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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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조양정(趙揚正)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에 생원이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가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부사과로서 한때 파직당했다가 낭관과 사간원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이어 영암군수를 거쳐 1617년 영천군수로 있을 때 각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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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조한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몸소 토석을 운반하여 묘를 이루고, 3년 동안 육식을 끊고 마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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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에 있는 돌장승. 미륵 불상 모양과 비슷해서 이곳 사람들은 미륵정이라고 부른다. 김기수의 자손들이 장승을 보호하고 칠월 칠석이면 여기에 모여 제사를 지내자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나, 전설에 의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 아들을 낳도록 해줄 테니 집 한 채 지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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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대보름에 달맞이를 하면서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면서 노는 놀이. 정월 대보름에는 달맞이를 한다.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야산이나 언덕 위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달집을 만들기도 하고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줄이 달린 깡통에 숯과 풀, 나무토막 등을 담아서 돌린다. 불이 담긴 깡통을 돌리는 것이 놀이 방법이다. 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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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옹(德翁), 호는 송헌(松軒), 진취(陳就)의 후예이며, 진몽일(陳夢日)의 아들이다. 진대수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여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형 진희수(陳稀壽)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구환(救患)하였다. 초시(初試)를 치르러 갔다가 장내가 혼란함을 보고 부끄럽게 여겨 과거보기를 단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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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가(獻可), 호는 눌헌(訥軒). 이조참의 진준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참봉 진해수(陳海壽)이다. 진성유는 1612년(광해군 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학문이 깊고 넓었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구환하고,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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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거(子擧), 호는 초당(草堂). 이조참의 진준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봉사 진중회이다. 진재번은 성품이 강직하고 재주가 탁월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당숙인 진사 진성유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성에 이르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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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원(季元), 호는 우재(愚齋). 고려의 호부상서 사조의 후손이다. 용성군 진석의 17세손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수영이다. 진종립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등 무예에 뛰어났으며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장사 수십 명을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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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대사간 진준(陳遵)의 후손이며 참봉 진대수(陳大壽)의 아들이다. 진중회는 효성이 지극하며 강개한 기상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결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남원에는 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량이 모자라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고 군량 100석을 보내어 도왔다. 또한 가동과 전마를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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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립 중등 교육 기관. 창주서원(滄州書院)은 조선 중기의 지방 관리이자 많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옥계(玉溪) 노진(盧稹)의 학문 업적과 효행, 덕행을 기리며 후진 양성과 함께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제향하는 사림의 서원이다. 노진은 본관이 풍천으로, 자는 자응(子噟), 호는 옥계(玉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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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화암(和庵). 경평공(景平公)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생원 채원상(蔡元祥)이다. 활쏘기 솜씨가 뛰어났던 채희연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출전하였다. 채희연은 만약 자신이 전사하면 시체를 거둘 때 신원을 파악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늘 푸른색 도포를 입었다고 한다. 채희연은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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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정월 초사흘 날에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주부가 지내던 고사. 고사를 지내기 전 주부는 목욕재계하고 대문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는다. 초사흘 고사는 주부가 중심이 되어 집안 식구끼리 제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무당을 부르기도 한다. 초사흘 고사에 사용하는 제물은 설날에 만든 음식 중 남겨두었던 것으로 장만한다. 이 고사에 사용된 제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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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내심(乃心), 호는 동량(㠉梁). 한성부 우윤 최연(崔葕)이 손자이며, 최휘지(崔徽之)의 아들이다. 최계옹은 1681년(숙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設書)를 지냈다. 1695년 지평으로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정언을 지냈다. 1704년 장령으로서 앞서 단종이 폐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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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목이(目邇), 호는 정암(貞菴). 연촌 최덕지의 후손이며, 암계 최연손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예빈시정 최신립(崔信立)이다. 최계원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강직하며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고을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과 군량을 모았으며, 죽기를 맹세하고 왕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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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영중(永仲), 호는 후촌(後村).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이고, 암계(巖溪) 최연손(崔連孫)의 6세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을 지낸 최엄조(崔淹祖)의 5세손이다. 참의(參議) 최태윤의 증손이며, 처사(處士) 최염의 아들이다. 최계인은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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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기수(奇叟), 호는 병암(屛巖). 만육(晩六) 최양(崔養)의 후손이며, 교수(敎授) 최경선의 아들이다. 최담령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일어나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 수천 명을 모았다. 또한 집안의 재산을 털어서 군수 물자를 보급하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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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영동리에 있는 조선 시대에 설립된 초·중등 교육 기관. 최락당은 1600년(선조 33) 경주김씨 수은공 김충한의 5대손인 별제공(別提公) 김익기가 정자를 지어 처음으로 강의를 하였고, 그의 아들 김유가 중수하여 야은당(野隱堂), 혹은 쌍백당(雙栢堂)이라는 당호를 지어 거처한 곳이다. 김익기의 증손인 김선(金宣)이 선조 때 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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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패란당(佩蘭堂). 영의정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의 후손이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된 최적(崔敵)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에 태어난 최상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또한 체구가 우람하였다.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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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중은(仲誾), 호는 죽곡(竹谷). 대사성(大司成) 최자빈(崔自濱)의 후손이다. 삼례찰방 최효원(崔孝源)의 손자이다. 사계(沙溪)의 제자 김헌의 문하에서 배우고 외가가 있는 전라북도 남원으로 내려와 살았다. 당시 학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죽곡유고(竹谷遺稿)」가 『오성세고(烏城世稿)』에 합철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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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민(汝敏). 영의정 최항(崔恒)의 6세손이며, 한림 최언수(崔彦粹)의 손자이다. 좌승지(左承旨) 최적(崔敵)의 둘째아들이다. 최상인은 재주가 남다르게 탁월하였고,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지조와 기개가 돈독하고 충효를 인륜의 최우선에 두고 이를 실천하는 데 힘썼다. 1609년(광해군 1)에 생원시(生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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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 영의정 최항(崔恒)의 6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최영(崔穎)의 아들이다. 최상중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게 사사했다. 1576년(선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1589년(선조 22)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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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이자 효부. 적과방(迪果坊) 사노(私奴) 최억춘(崔億春)의 아내이다. 그녀는 나이 30세가 되어 남편이 죽었다. 그녀의 시부모는 모두가 맹인이어서 의지할 바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사위가 죽자 그녀를 친정으로 데려갔지만, 번번이 시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품팔이를 하여 시부모님을 봉양함으로써 효를 다하였다. 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사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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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화순(和順). 호는 택암(澤巖), 고려 충신 최영유(崔永濡)의 9세손이다. 최여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그의 사촌 형인 양지당(養祉堂) 최여운(崔汝雲)과 함께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병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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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여앙(汝仰), 호는 양지당(養祉堂). 문충공(文忠公) 최선문(崔善門)의 후손이며, 지평(持平) 매헌(梅軒) 최달승(崔達昇)의 손자이다. 최여운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한 힘이 세었다. 부모의 상을 당할 때마다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족형(族兄)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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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유장(孺長), 호는 성만(星彎) 또는 성연(星淵). 영의정 최항(崔恒)의 7세손이며, 사간(司諫) 최상중(崔尙重)의 아들이다. 최연은 1576년(선조 9)에 태어나 1603년(선조 3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다. 광해군 때 예조좌랑(禮曹佐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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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로(文路). 만육(晩六) 최양(崔養)의 8세손이며, 판결사(判決事) 최제의 아들이다. 최예달은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봉직랑(奉直郎)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또한 문장과 행실이 탁월하고 기백이 남달리 뛰어났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과 의병을 모아 과천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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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했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 영의정 최항(崔恒)의 7세손이며, 교리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의 아들이다. 최온은 1583년(선조 16)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남다르더니 나이 11세에 명나라 장수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천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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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원지(遠志), 호는 쌍백당(雙柏堂). 영의정 문정공 최항(崔恒)의 7세손이며, 군수 최적의의 손자, 충의위(忠義衛) 최상근의 아들이다. 최위는 1599년(선조 32)에 태어났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그는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데 묘 앞의 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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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경선(景善). 영의정 태허정 최항(崔恒)의 후손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 최언수(崔彦粹)의 아들이다. 최적은 지조가 굳고 경학이 높고도 밝아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역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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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했던 의병.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 문정공 최항(崔恒)의 8세손이며, 대사헌(大司憲) 최상중(崔尙重)의 손자이다. 좌윤(佐尹) 최연(崔葕)의 아들이다. 최휘지는 1598년(선조 31)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1624년(인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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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명나라 장수. 세심당(洗心堂) 추수경(秋水鏡)[1530~1600]은 명나라 무강자사로 재임하며 부러움 없는 영화를 누렸으나 이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다섯 아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왜군과 싸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고, 마침내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전주를 사수한 장군이다. 본관은 추계(秋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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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당. 충렬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하여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노 4충신을 봉안하고 제사드릴 목적으로 1612년에 설립되었다. 곧이어 별장 신호,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3충신이 추가 봉안되어 7충신의 위패를 봉안하며 제사드리는 사당으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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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여인(汝仁), 호는 정기제(正己齊).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의 아들이다. 태귀생은 활과 말을 잘 다루었으며 계략이 담대하였다. 1555년(명종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注簿)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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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진옥(振玉), 호는 삼현정(三賢亭).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주부(注簿) 태귀생(太貴生)의 아들이다. 태상문은 기사에 능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가 그에게 장사 1,000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형제·숙질(叔姪) 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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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군실(君實), 호는 공북재(拱北齋).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태응천의 아들이다. 태색은 효우가 돈독하고 문학이 뛰어나 칭송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여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카 태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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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영중(榮仲).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임진왜란에 순절한 참봉(參奉) 태구(太竬)의 아들이다. 태시경은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남원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흥업과 함께 성을 지킬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그 사이에 적에게 성을 함락당하였다. 이때 태시경의 아버지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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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선충(善忠), 호는 매계(梅溪).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좌랑(佐郞) 태은정(太殷鼎)의 아들이다. 태우는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아버지인 주부(注簿) 태귀생(太貴生)을 따라서 아들 태시경(太時慶)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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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陜溪).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의 아들이다. 태천생은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좋아했으며 재지(才智)가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태귀생(太貴生)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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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효부. 유학(幼學) 태천우(太天祐)의 아내이다. 그녀는 천성이 착하고 정성이 한결같았으며 부도(婦道)를 닦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기는 데 효도와 공경을 함께 하였다. 시어머니가 질병에 걸리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질병이 더욱 깊어지자 그녀는 똥을 맛보아 질병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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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陜溪), 자는 기팔(起八).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현감(縣監) 태석(太碩)의 아들이다. 태팔회는 천성이 순후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련(太福連)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군량도 모아 공주(公州)로 인조를 호가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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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 초에 한 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을 가늠하는 관습. 설날부터 정월 12일까지는 12간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기준으로 ‘털날’과 ‘털 없는 날’로 구분한다. 털날은 12간지의 동물에게 털이 있는 날로서 소, 호랑이 등 대부분의 동물이 해당된다. 반면 털 없는 날은 용과 뱀만 해당한다. 설날이 털날이면 그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고 설날이 털 없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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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걸립패나 굿중패·두레패가 넓은 마당에서 농악의 기예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짜서 노는 농악. 판굿은 농악의 일종이다. 농악은 농사와 관련된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서 징, 꽹가리, 북 등의 타악기를 이용하여 리듬을 만들고 그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와 직접 관련되지 않고 이런 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지역에 따라 굿, 금고, 매구,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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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음력 정월에 마을 대항으로 돌을 던지면서 싸움을 하는 놀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을의 모든 남자들이 마을 경계 부근에 모여 하천이나 들판을 사이에 두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돌에 맞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주의만 집중하면 날아오는 돌은 거의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간혹 주의가 산만해 진 경우 돌에 맞기도 하며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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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평촌리 새터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가마터. 평촌리 새터마을 가마터 일대는 예전부터 점밭골, 점실로 불리는 등 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이 있다는 의미의 지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풍부하여 도자기를 굽는 데 좋은 환경적 입지를 갖추고 있다. 새터마을 동쪽에 있는 문덕봉 능선 줄기 해발 170m에 위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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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유원(流遠). 하연해(河漣海)의 아들이며,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와는 칠촌 간이다. 하득도는 성품이 우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당숙 및 같은 고을의 의병들과 밤낮으로 북진하여 청주에 이르렀다.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 동지 8명과 단구(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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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양진(養眞). 안렴사(按廉使) 하중용(河仲龍)의 후손이며, 도사(都事) 하극윤(河克潤)의 아들이다. 하만리는 학행이 뛰어나고 언 강에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할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폄재(砭齋) 최온(崔蘊), 당촌(塘村) 황위(黃暐) 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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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문양공(文襄公) 한계미(韓繼美)의 후손이며, 승지(承旨)에 증직(贈職)된 한언윤(韓彦胤)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달려가 인조의 어가를 호위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진무원종공신(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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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지(常之). 청성군(淸城君) 한종손(韓終孫)의 손자이다. 한계상은 음사(蔭仕)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야수(野叟) 채홍국(蔡弘國)과 함께 흥덕(興德)·남당(南塘)에서 뭉쳐서 호남을 지켰다. 또 정유재란 때에는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중상을 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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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인.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오(相五). 증조부는 승지(承旨) 한복(韓輹), 조부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한응문(韓應文), 아버지는 수운판관(水運判官) 한경생(韓庚生)이며, 외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효원(趙孝元) 장인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이경헌(李景憲)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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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한응성은 장성한 뒤에는 처가인 순창 귀미(龜尾)로 옮겨 살았다. 호가 귀와(龜窩)인 것은 귀미에서 따온 것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기(景期), 호는 귀와. 청성군(淸城君) 한종손(韓終孫)의 고손자이고, 대호군(大護軍) 한축(韓軸)의 아들이다. 한응성은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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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이(受而). 안양공(安襄公) 한종손(韓終孫)의 6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한응록(韓應祿)의 아들이다. 아저씨뻘인 한경생(韓慶生)과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에 살을 베어 구환하여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적병에게 포위된 상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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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 별좌(別坐) 허사익(許思益)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3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 등을 역임했다. 1616년(광해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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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옥(大玉). 판서(判書) 형규(邢珪)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형우안(邢友顔)의 증손이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포위당하자 입고 있던 비단옷에 “죽어도 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 된 직분(死不避亂 臣子職分)”이라는 여덟 글자와 이름을 혈서로 쓴 뒤 성으로 달려갔다. 남원부사 임현(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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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벼농사의 김매기가 끝나는 시기인 6월·7월에 농군들을 위로하는 잔치. 주로 소작을 주거나 머슴을 두고 있는 대농의 집에서 호미씻기를 주관하였으나 마을 단위에서 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미씻기를 하면 소나 돼지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나누어 먹고 술을 마시면서 농군들을 위로하였다. 고기값은 마을 공동 작업인 두레에서 받은 돈으로 하고 술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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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에 있는 동제를 지내던 제단 터. 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동당골이라고 부르는 곳에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갑오농민혁명이 있기 전까지 이곳에서 홍북단(洪北檀)이라는 단을 세우고 당산제를 성대하게 지냈다고 한다. 갑오농민혁명 이후 배를 만들기 위해서 당산나무를 베어낸 뒤에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홍북단이 있었던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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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봄철에 산이나 들에서 진달래 꽃잎을 따서 붙임 떡을 만들어 먹으면서 노는 놀이. 화전(花煎)은 진달래 꽃잎을 놓아서 부친 전을 말하는 것으로서 진달래가 만개하는 음력 3월~4월에 화전놀이를 하였다. 날을 잡아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산이나 들로 나가서 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특히 음력 3월 3일에 화전놀이를 많이 하였다. 이 날은 3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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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정숙(正叔). 양정공(良靖公)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이다. 황대중은 효성이 지극하여 효건(孝蹇)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참봉(參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병사(兵使) 황진(黃進)을 따라 진주성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통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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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석여(錫汝), 호는 운계(雲溪), 무민공(武敏公) 황진(黃進)의 증손이며, 당촌(塘村) 황위(黃暐)의 아들이다. 황신구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탁월했고, 소년이 되자 이미 옛 선인들의 학문을 이해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은거하여 후진을 교육하였는데 많은 선비가 모였고, 고관대작들이 그의 높은 절의를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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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字)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의 손자이며 현령(縣令) 황정열(黃廷說)의 아들이다. 아들중에 학행이 높았던 황신구(黃信龜)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황임구(黃任龜)가 있다. 황휘는 어려서부터 시 쓰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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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군익(君翊).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의 아들이다. 황정직은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1606년(선조 39)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전주병마절제도위(全州兵馬節制都尉), 1608년(선조 41)에 옥구현감(沃溝縣監), 1611년(광해 3) 제주목판관(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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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고죽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의 터. 황죽서재는 영광유씨 가문의 강당에서 설립되었으며, 인근 백파방과 백암방의 학동들에게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가르쳤다. 황죽서재는 오랜 전통의 촌합형 서당으로, 훈장 우호정과 김사헌이 지도를 하였으며 100여 명의 후학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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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공(武愍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며, 황윤공(黃允恭)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황위(黃暐)는 황진의 손자이다. 1576년(선조 9)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로 사신 황림(黃琳)을 보좌하여 군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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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인 황진의 집안에서 간직해 온 고문서. ‘황진가 고문서’는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와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에 세거하는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1550~1593]의 후손인 황호연(黃鎬淵)과 황맹연(黃孟淵)의 집에서 각각 보관하고 있는 장수황씨(長水黃氏) 문중의 고문서이다. 고문서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임진공신으로 유명한 무민공 황진 장군과 그의 아들·손자가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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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정월대보름에 아이들이 이웃 마을과 횃불을 만들어 싸움을 하던 놀이. 정월대보름 며칠 전부터 대나무 빗자루나 싸리 빗자루를 이용하여 홰를 만든다. 정월대보름 저녁에는 홰에 불을 붙여 두 손으로 잡고 횃불을 돌리면서 마을 경계에 있는 들판이나 하천으로 나간다. 횃불을 돌리면서 상대 마을에 욕을 하기도 하고 약을 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마을과 횃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