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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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尙謙 |
영어음역 | Choe Sanggyeom |
이칭/별칭 | 여익,패란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패란당(佩蘭堂). 영의정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의 후손이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된 최적(崔敵)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567년(명종 22)에 태어난 최상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또한 체구가 우람하였다.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종친부의 전첨(典籤)과 화순·금구의 수령(守令)을 지냈는데, 모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여기에 응하여 찬조했다. 그는 군량미 보급의 책임을 맡아 남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금산에 이르기 전에 고경명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한다는 이른바 폐모론이 일어나자, 금오랑(金吾郞) 자리에 있던 그는 ‘「조오시(嘲烏詩)」’를 지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첨에게 미움을 받아 무고를 당하여 귀양을 갔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에 귀양에서 풀려났고, 1644년(인조 22)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