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14 |
---|---|
한자 | 崔薀 |
영어음역 | Choe On |
이칭/별칭 | 휘숙,폄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 영의정 최항(崔恒)의 7세손이며, 교리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최온은 1583년(선조 16)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남다르더니 나이 11세에 명나라 장수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천하에 보기 드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패륜을 보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두류산(頭流山) 아래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형 최연(崔葕)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북상하다가 적이 토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1634년(인조 12)에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해 겨울에 북방의 오랑캐가 조선을 침입하여 여러 고을이 적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관리들이 두려워서 피하자고 했으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들에게 고을을 굳건하게 지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있었는데, 그는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 찰방(察訪) 이기발,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찰방 유즙 등과 함께 도내에 격문을 전하고, 조카 휘지와 함께 의병과 군량을 모아 여산(礪山)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병력을 규합한 그는 다시 청주에 이르러 여러 고을의 제현과 합세하여 적병을 치고 계속 북상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까지 불과 20여㎞를 남겨놓고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후 효종 때 조정의 부름을 받고 경연에 나아가 북벌계획에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진선(進善)·장령(掌令)·승지(承旨)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59년(효종 10)에 향년 76세로 세상을 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대방세고』가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뒤에 노봉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