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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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徽之 |
영어음역 | Choe Hwiji |
이칭/별칭 | 자금,오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했던 의병.
[가계]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 문정공 최항(崔恒)의 8세손이며, 대사헌(大司憲) 최상중(崔尙重)의 손자이다. 좌윤(佐尹) 최연(崔葕)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최휘지는 1598년(선조 31)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1624년(인조 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금오랑(金吾郞)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1631년(이조 9)에 조정에서 내린 찰방(察訪) 벼슬을 성실히 이행하였다. 후에 그 자리를 떠나자 마을에서는 그를 위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북쪽 오랑캐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숙부 최온(崔蘊)을 따라 의병을 이끌었다. 청주와 과천으로 진격하며 계속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문을 닫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에 힘을 썼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이조판서로 임명하고 또 뛰어난 선비들을 많이 불렀는데, 이때 최휘지는 공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학문과 사상]
각종 경서(經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에 집중하여 학문을 닦았다.
[저술 및 작품]
유고로 『오주선생집(鰲洲先生集)』4권 1책이 『대방세고』에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노봉서원에 제향되었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으며,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묘지(墓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