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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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聃齡 |
영어음역 | Choe Damryeong |
이칭/별칭 | 기수,병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기수(奇叟), 호는 병암(屛巖). 만육(晩六) 최양(崔養)의 후손이며, 교수(敎授) 최경선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최담령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일어나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 수천 명을 모았다. 또한 집안의 재산을 털어서 군수 물자를 보급하였다.
그리고 김덕령과 함께 남원의 광한루에서 만나 함께 여러 가지 군사작전을 의논하였는데, 김덕령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장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군대를 이령군이라 불렀다. 두 장군은 광한루 앞에 심어진 수만 그루의 밤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여기에 군사를 포진하여 10여 일간 맹훈련을 시킨 후 영남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때 김덕령이 군사가 1만 명도 못 되는 것을 걱정하자 최담령은 “전쟁의 승패는 다만 장수에게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 군사의 많고 적음을 논하리오.” 라고 말하며 김덕령을 위로하였다.
진주에 이르러 군진을 치고 둔전(屯田)을 두어 전투와 수비의 방책으로 삼으니 군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적의 우두머리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겁을 먹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다.
1595년(선조 28) 의령의 싸움에서는 적병이 여울의 얕은 곳을 찾아 푯말을 세워서 깊이를 헤아려둔 사실을 김덕령과 함께 염탐하게 되었다. 그들은 몰래 푯말을 깊은 곳으로 옮겨놓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충용장 김덕령이 무고를 당하여 죽게 되었을 때 말하기를 “신이 비록 죽습니다만 원하옵건대 최담령은 아무 허물이 없으니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그를 변호해주었다.
[상훈과 추모]
뒤에 주부(注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종 때 참의(參議)의 증직(贈職)이 내려졌고, 주암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