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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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曹偉 |
영어음역 | Jo Wi |
이칭/별칭 | 태허,매계,문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상규 |
[정의]
조선 전기 삼봉도[지금의 독도] 정토에 사용할 전함의 건조를 감독하고 체류민을 쇄환시킨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조경수(曹敬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심(曹深)이고 아버지는 울진현량 조계문(曹繼門)이다. 어머니는 유문(柳汶)의 딸이다.
[활동사항]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조석문(曹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에 뽑히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정자·저작·박사·수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홍문관 교리·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9년(성종 10)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에 임명되어 삼봉도 정토에 사용할 전함의 건조를 감독하고 체류민을 쇄환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저술 및 작품]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
또 유향소(留鄕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하여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 「조계문묘비」가 있고, 저서로 『매계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금산의 경렴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