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541 |
---|---|
한자 | 南九萬 |
영어음역 | Nam Gum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규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조선 후기 문신으로서 정치·경제·행정·군정·인재 등용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으며, 문장에서도 뛰어나 책문·반교문·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겼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이다.
[활동사항]
남구만은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59년(효종 10) 홍문록에 오르고 곧 교리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662년(현종 3)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 사업을 벌였다. 이어 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1668년(현종 9) 안변부사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74년(현종 15) 함경도 관찰사로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숙종 초에 대사성과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좌윤이 되어 윤휴(尹鑴)와 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그 후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숙종 10) 우의정, 1685년(숙종 11) 좌의정, 1687년(숙종 13) 영의정에 올랐다. 송시열(宋時烈)의 훈척 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으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강릉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었으며, 당시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서계를 보내오자 남구만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을 보냈다. 1696년(숙종 22)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701년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가벼운 처벌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부처(付處)·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약천집(藥泉集)』과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