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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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隱州視聽合記 |
영어음역 | Eunjusicheonghapg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승진 |
[정의]
1667년(현종 8)에 사이토 호센이 간행한 독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문헌.
[편찬/발간경위]
1667년 일본 운주(雲州) 지방 번사(藩士)였던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은주(隱州)[온슈]를 관찰하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기록으로 당시 바다를 표류하던 중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다.
[형태]
일본어로 된 필사본으로 5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16.2㎝, 세로는 23.6㎝이다.
[구성/내용]
『은주시청합기』의 내용 중 일본과 한국의 논쟁거리가 지속되고 있는 부분은 「국대기(國代記)」의 해석이다. 논의의 초점은 “그러한즉 일본의 북쪽 경계는 이 주까지로 한다(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라는 구절로 ‘차주(此州)’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은주(隱州)[현 오키섬]를 가리키는 것인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독도에 대한 역사적 근원이 한일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있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서 양국 모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여기서 은주(隱州)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를 살펴보자. 한국 측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은주(隠州)는 북해 가운데 있으므로 ‘은기도(隠岐島)[오키시마]’라고 한다. 살펴보건대, 일본 고유의 말로 ‘바다 가운데(海中)’를 ‘오기[遠幾]’라고 했는데 거기서 연유한 이름일까? 그 남동에 있는 땅을 ‘도오젠[嶋前]’이라고 한다. ‘치부군’과 ‘아마군’이 이에 속한다. 그 동쪽에 있는 땅은 ‘도고[嶋後]’라고 하며, ‘시키치군’과 ‘오치군’이 이에 속한다.
그 부[수도]는 ‘시키치군’ 남해안의 ‘사이고 도요자키[西鄕豊崎]’이다. 이곳[오키국]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이즈모국[出雲國] 미호세키[美穂關]에 이르기까지 35리[약 13㎞]가 되며 오키국으로부터 남동쪽(辰巳)으로는, 하쿠슈[泊州] 아카사키우라[赤碕浦]까지는 40리[약 15㎞]이다. 오키국으로부터 남서쪽[未申]으로는 세키슈[石州]의 유노츠[温泉津]까지 58리[약 22㎞]로써 북쪽[子]에서 동쪽[卯]에 이르기까지 육지가 없다.
일본의 오키시마로부터 북서쪽으로 배로 두 낮 하루 밤 거리를 가면 송도(松島)[당시의 독도]가 있고, 송도로부터 하루 낮거리에 죽도(竹島)[울릉도]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기죽도(磯竹島)라고 한다. 대나무·어류·바다표범이 많다. 생각해 보건대, 신서에서 말하는 소위 이소타케루[五十猛]가 아닐까?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이 두 섬에서 고려[조선]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차주(此州)[은주]로 한계를 삼는다.(隠州 在北海中故云隠岐島. 按倭訓海中言遠幾故名歟 其在巽地言嶋前也 知夫郡海部郡屬焉 其位震地言嶋後也 周吉郡穩地郡屬焉 其府有周吉郡南岸西鄕豊崎也. 從是. 南至雲州美穂關三十五里辰巳至伯州赤碕浦四十里未申至石州温泉津五十八里 自子至卯 無可往地戍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俗言磯竹島 多竹魚海鹿 按神言所謂五十猛歟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隠州 然則 日本之乾地 以 此州 爲限矣)”
일본 측의 번역은 다른 부분은 한국 측과 별다르지 않으나 “연즉일본지건지이차주위한의(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 이 문구를 “앞에서 말한 이 두 개의 섬들[죽도와 송도]로써 일본 서북부의 한계로 삼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영토 귀속 논쟁을 일으킬 때마다 이 문구를 들고 나왔다. 이러한 일본 측 해석은 문맥과 『은주시청합기』「국대기(國代記)」 전체의 내용을 무시한 왜곡된 해석이다.
[의의와 평가]
일본인이 기록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문헌으로서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독도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찾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