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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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復興運動 |
영어의미역 | Bakje Resistance Move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양종국 |
성격 | 부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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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660년 7월 |
종결연도/일시 | 663년 |
발생(시작)장소 | 백제지역 |
관련인물/단체 | 도침(道琛)[?~661]|복신(福信)[?~663]|부여풍(扶餘豊)[?~?]|흑치상지(黑齒常之)[?~689]|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 |
[정의]
660년 7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정복당한 뒤 금강 유역을 비롯해 백제 전역에서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
[역사적 배경]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大耶城)[현 경상남도 합천군]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등 관산성(管山城) 전투(戰鬪)에서 성왕(聖王)의 전사로 실추된 백제의 국위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로 하여금 당의 고종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결국, 659년 4월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당나라의 고종은 신라의 구원병 요청을 받아들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상 밖의 나당연합군의 공세 앞에서 백제는 기벌포(伎伐浦)[현 금강 하구]와 황산벌[현 논산시 연산면], 부여나성(扶餘羅城)[현 부여군 염창리] 부근에서 연이어 패배한 뒤, 사비성마저 함락되었다. 결국 웅진성[현 공주시]에 피신해 있던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항복하고, 9월 3일 수많은 왕족과 관료 및 백성들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당나라는 사비성[현 부여]을 함락시킨 후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나, 5도독부는 백제의 일부 지역 외에는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로는 흑치상지(黑齒常之), 복신(福信), 도침(道琛), 부여풍(扶餘豊), 여자진(餘自進), 지수신(遲受信), 사타상여(沙咤相如), 정무, 조복, 파가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흑치상지, 복신, 도침, 부여풍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수도 함락 이후, 흑치상지는 임존성(任存城)[현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을 거점으로 하여 3만 명의 병력을 수습,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면서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또한,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고 한 달 후인 660년 10월 의자왕의 사촌인 복신과 승려 도침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원군 요청과 함께 왕자 부여풍의 귀국을 요구하는 한편, 주류성(周留城)[현 전라북도 부안군 우금산성?]을 근거로 군사를 모으고 나당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662년 부여풍이 도착함에 따라 백제 부흥군은 부여풍을 풍왕(豊王)으로 추대하고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는 틈을 타서 금강 동쪽으로 진격해서 사비성과 웅진성을 고립시켰다.
이때 백제 부흥군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복신이 승려 도침을 죽이고, 휘하 군사를 거의 장악하여 부여풍마저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내분을 눈치 채고, 당나라 군대는 주류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위기에 처한 백제 부흥군에 일본에서 파병한 400여 척의 선박과 약 37,000여 명의 응원군이 도착함으로써 백제 부흥군은 전력을 가다듬고 663년 8월 백촌강구(白村江口)[현 동진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백강구전투(일명 백촌강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결국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결과]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함락된 지 얼마 후 임존성마저 함락됨으로써 663년 말, 3년여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였다. 고구려로 도망친 부여풍은 668년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결국 중국의 영남지방(현 광동성과 광서성)으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백제부흥운동 중반까지 큰 활약을 펼쳤던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복신을 죽인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유인궤(劉仁軌)에게 패하여 항복한 후, 오히려 백제의 부흥운동세력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서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건너가 돌궐(突厥)을 상대로 큰 전공을 세워 대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반란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의의와 평가]
나라가 외세에 점령당한 후 이를 부흥시키기 위해 백제처럼 치열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난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점령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부여풍의 경우처럼 왕으로 옹립되어 왕조를 부활시킨 예는 백제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만큼 백제인의 나라를 생각하는 정신이 강했다고 여겨지는데, 지도층의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어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실패로 끝났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