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장 삼척진씨는 양반이지]

수백년간 열두대징이를 지킨 집안이 있다. 밀양변씨, 삼척진씨, 전주이씨가 순서대로 입향하여 중장리 일대에 자리잡았고, 훗날 동래정씨가 아랫동네인 하대리 넓은 땅을 소유하면서 세거하였다. 이 네 가문은 오늘날 대부분 마을을 떠나 후손을 찾아보기 힘든데, 지금까지 집안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윗장마을 진중용씨 부부이다.

중장1리 윗장마을에 입향한 삼척진씨는 약 50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 과연 중장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가문은 전라도 익산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로, 지금도 익산에는 많은 후손이 살고있다. 익산에 살았던 13대조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중장리 윗장에 자리를 잡은 이래 집안 대대로 뿌리내려 온 마을에 진중용씨는 여든이 넘는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삼척진씨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주로 윗장이었고 점차 자손들이 퍼져 농바위(현 중장2리)에도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삼척진씨 습독공파(習讀公派) 족보를 보면 입향조 진응린(陳應麟)의 후손들의 묘소는 중장리 신암과 농암, 구왕리 판암 등에 흩어져 있다. 아마도 중장리와 구왕리 일대의 토지를 진씨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실제로도 일제강점기 전까지 그쪽의 산과 농경지 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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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의 진씨네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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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리 - 삼척진씨 진중용 씨 인터뷰

[금광일을 하셨던 아버지]

총명하셨던 아버지는 금광에서 화약 감독일을 맡아서 가까운 내흥리 광산에서 일을 했다. 공주 땅에 금맥이 지나고 있는지 몰라도 그 시절 곳곳에 금광이 개설되었고, 특히 공주에서 계룡면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산골마다 온통 금광 투성이었다. 금광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벌써 곳곳에 전기가 들어왔고, 동네에서는 내흥리 광산이 있던 산은 속이 텅 비어있는 꼴이라 한탄할 정도로, 그 시절에 일제는 금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젊은이들이 일제에 의해 억지로 징용과 징병을 당하여 일본에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하루하루가 늘 아슬아슬한 심정이었는데 열여덟살 되던 해에 결국 대전 보국대에 끌려갈 위기에 처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나 다름없었기에 계룡산 꼭대기로 몸을 숨겼는데 천우신조였는지 바로 일주일만에 해방이 되었다.

광산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당시에 금을 걸러내는 일명 ‘금방아’ 찧는 공장을 운영하던 분과 친하게 지내다 그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자식들을 결혼시키로 약속을 했다. 두분의 약속에서 혼인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불과 한달만에 혼례식을 치렀는데 신부는 가마를 타고 왔고, 혼례식 날에야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25세의 신랑과 21세 신부... 55년전 그날을 떠올리니 부부는 모두 웃음이 난다. 참 다행히도 신부는 그렇게 곱고 예쁠 수가 없었고, 신랑은 훤칠한 젊은이였다. 신부는 청양 정산의 미당이 고향인 처녀였다. 아버지가 금광 일을 하시면서 일찍 고향을 떠나 공주에 살기는 했지만, 지금도 누가 물으면 정산 미당이 친정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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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흥리 금광산 터

[혼례식에서 처음 만난 신랑신부]

지금 사는 집이 바로 신혼 살림을 차린 집이었다. 스물한살 새색시는 처녀 적에 보았던 당사주에서 어렴풋이 이 동네가 보였다. 그런데 시집 온 날 처음 본 동네가 낯이 익어 사주의 점꾀가 맞았음을 알고, 여기에서 살 팔자려니 했단다.

엄한 시부모님은 때로는 무섭기도 했지만, 다정하셨다. 아들 둘, 딸 다섯 7남매를 낳았는데, 그중 아들 하나를 잃고 가슴앓이를 했다. 그때에는 버스가 다니지도 않아서 공주시내까지 나가려면 지름길을 따라 산 넘고 하천을 건너 반나절씩 힘들게 걸었다. 탈 없이 건강하다 갑자기 쓰러진 어린 아들을 병원까지 업고 가기에는 너무 먼 길이었다.

나이 일흔일곱. 수십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추억을 떠올리면 어제 일만 같은데, 가슴에 묻은 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들이 죽던 그 해에는 남편 진중용씨가 잠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을 하던 때라 아내의 슬픔과 죄책감은 더욱 컸다.

큰 딸도 잔병치레가 잦았는데, 아슬아슬한 고비를 한두번 넘은게 아니었다. 공주 시내는 커녕 면소재지를 가려고 해도 물 깊은 중장천을 맨발로 건너야 할 만큼 외부로 나가기 힘들어 자식들이 아플때마다 가슴만 칠 수밖에 없었다. 일명 ‘침쟁이’라 부르던 이가 아랫동네에 살아서 가끔 다니기는 하였다.

동네 어른들 말씀에 아이가 자주 다치고 경기하는 것을 예방하려면 출산할 때에 바닥에 짚이 아닌 띠풀을 깔면 좋다고 해서 억센 띠풀을 베어다 지성으로 말리고 돗자리를 만들었다. 옛사람들 말이 맞았던 것일까. 그 방법을 쓰고부터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들 하나를 두고, 아들을 더 갖기를 원했지만, 그 후로 연이어 딸을 낳으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번번히 딸이 태어나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때 그 엄하던 시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다. “어떻게 아이를 골라서 낳을수 있느냐. 그럴 수 있으면 아들 없는 집이 없지.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 있으면 되었다. 너무 속 썩지 말거라.”

그렇게 가진 1남 5녀 자식들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살아주고 있다. 큰딸은 옛 이야기를 할때마다 엄마 마음고생 시킨거 반도 못갚았다는 말을 하지만 되려 미안한 마음만 든다. 아들은 1990년대 초반 IMF 외환위기 당시 다니던 회사가 곤경에 처하는 바람에 많이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

[‘힘들다 힘들다해도 지금이 살기좋지’]

윗장마을은 온통 삼척진씨들 일색이라 옆집은 큰아버지 앞집은 작은조카가 사는 식으로 전통있는 동족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외지로 빠져나갔고, 남은 집은 진중용씨와 길 건너편의 열녀문 있는 큰집 외에 몇 가구에 불과하다. 진중용씨는 평생을 살면서 젊은시절 2년간 밖에서 일을 했던 것을 제외하면 한번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집터가 좋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어디를 가든 집은 팔지 말라하여 이렇게 평생을 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결혼할 무렵 새로 개조한 것인데, 길 건너 열녀문 있는 큰집도 비슷한 시기에 대대적인 공사를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공사하기 전까지 큰집은 십수칸에 이르는 말그대로 큰 집이기도 했는데, 안채와 사랑채에는 수많은 방과 마루가 있었고 넓은 토광도 있었다.

농암마을 농바위 옆에 있는 진씨네 기와집 역시 규모가 큰 부잣집이라 동네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남아 전하기도 한다. 농바위에서 쌀이 나오는데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집안이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꿩이 엎드린 모양의 명당인 복치형 형국의 땅에 장군석을 세우는 바람에 망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웃한 농암의 진씨네는 가세가 기울어 기와집을 떠나야했다.

오랜세월을 한 동네에서 살다보니 좋지 않은 일도 있었다. 진중용씨의 증조부때 아랫동네 어떤 집안과의 산송이 벌어져 무려 20여년간 관청을 오가며 분쟁을 한 끝에 결국 진씨 집안이 승소하여 그 증거로 받은 완문(完文)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완문에는 당시의 억울했던 상황이 자세하다. 산을 매매하는 가운데 이중으로 계약을 했다는 누명을 썼는데 하필 그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 것이 공주에서 위세께나 떨치던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던 집안 어른들의 노력이 옛 문서에 고스란히 남아 전한다.

중장리의 대표성씨로 세거했어도 인심을 잃지 않아 동학난이나 6·25 전쟁때에 집안에는 큰 일 없이 무사히 지냈다. 중장리의 바로 옆동네인 내흥리와 하대리가 이른바 ‘공주의 모스크바’라 불리울만큼 좌우익 갈등이 심했고, 계룡산은 전쟁 말기부터 빨치산이 활동했던 곳인데 다행히 중장리에서는 사건이 없었다. 어떤 날에 총에 맞은 남자가 밭 가운데서 신음하는 것을 보고 데려다 몰래 치료해주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그 사람의 자식들이 크게 성공해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야말로 살기가 ‘대간했다’ 대간하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고단하다는 의미의 충청도 사투리이다. 겉보기엔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마을이지만, 산간이라 다른데에 비해 농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교통도 불편하여 먹고사는 문제가 항상 절박했던 것이다. 머슴을 몇 명씩 두었지만, 워낙 가족과 친지가 많아서 매일같이 밭일을 하고 디딜방아를 돌리며 살았다.

요즘에야 세상 살기 좋아졌는데 몸이 늙고 힘드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늙은 것을 안타까워한들 무엇하랴. 이제는 논밭 두마지기 농사를 지으며 그저 내 일년 먹거리를 해결하면 그만이다.

[문중과 마을주민이 함께 한 용지학원]

우리는 가끔 지도층과 부유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의 결여를 한탄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우리 조상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던 규범이었다. 어디를 가나 유명한 가문들이 수백년간의 가풍을 이어오며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았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장의 삼척진씨가 500여년의 세월을 건너온 것도 타성들과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한말에는 삼척진씨가에서는 농암에 서당을 건립하고 가문의 아동들을 교육하였는데, 김은구씨 등 상장마을 사람들과 합심하여 서당을 마을사람들에게도 개방하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서당의 운영이 활기를 띄자 주민들과 함께 서당을 확대시키자 논의하였고 중등교육기관인 용지학원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이때에 공주 사범대학 학생들이 와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또한 인연이 있던 변호사 김영택씨와 그의 부인 오경숙씨가 용지학원의 뜻을 이어받아 학원 건물을 짓고 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경숙씨는 공주여고 출신으로 피아노를 잘 치는데다 아주 미인으로 글씨 솜씨도 좋았다고 기억된다. 부부는 갑사 근처의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 훗날 작고 한 후 동네에 묘를 썼다. 갑산수마을의 곽삼영씨는 어렵던 시절에 셋째딸이 용지학원을 다녀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용지학원에서 많은 학생이 교육을 받았으나 학생 수가 점점 줄고, 이미 경천리에 경천중학교가 있던 관계로 중학교로 승격하지는 못한채 폐교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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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지학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