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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마지막 민간재인 김재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D040101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을경

[잊을 수 없는 소리꾼]

마을에 연세 60대 이상의 어른들은 누구나 기억하는 소리꾼이 있다. 삼거리마을에 살았던 김재익. 그는 공주의 민간 재인 중 마지막 우두머리 재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유명한 재인이었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실력이 청출어람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살아있다면 100살쯤 되었을까. 미인박명이라더니 6·25 전쟁 직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에는 중장2리인 오미마을에 살다 삼거리마을로 이사와 말년을 보냈다. 삼거리는 세 길이 만나는 자리라 예전부터 주막집 몇 개가 자리잡고 있었고, 장사도 잘 되었는데, 주막 앞에서 멍석을 깔고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주막 앞에 모여 구경을 했다. 특히 가야금 실력이 탁월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왠만한 악기는 못다루는 것이 없었다. 그의 소리는 노랫가락이 아니라, 정식으로 배운 듯한 수준급이었다. 흥부가와 심청가를 부를때엔 눈물을 철철 흘려, 보는 사람들 모두 눈물을 닦느라 옷소매가 흠뻑 젖을 정도였고 새소리와 짐승소리도 실감나게 들려줬다. 공주에서 최고라고 했지만, 충청도에서도 손꼽힐 만한 실력이었고, 인물도 수려하여 더욱 인기를 끌었다. 동네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주의 마지막 재인]

일제강점기 때 탄천과 공주 읍내에 거주하는 재주꾼들을 모아 마당공연을 하며 일생을 살아 공주와 논산 등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예술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공연은 풍장패와 퉁수와 피리를 부는 사람들, 그리고 판소리꾼이 함께 했고 민요를 잘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까지 가서 공연을 했고, 삼거리마을에 살면서 찾아오는 재주꾼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갑사계곡에 별장을 두었던 박충식은 별장에 손님들을 이끌고 올 때마다 김재익을 불러 소리를 듣곤 했다. 동네사람들의 잔치에도 하루 품삯을 받고 공연을 해주었다.

혼인 후에 아들 하나와 딸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일찍 죽었고 딸들은 모두 시집가서 어디에 사는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묘가 동네에 있었는데, 자손들이 와서 화장하여 이장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재익과 관련하여 남아있는 문화는 찾기 어렵다. 다만 그의 영향이었던 까닭인지 공주시에서 판소리와 단가가 가장 많이 불리는 마을이 중장리이다.

공주의 소리꾼들은 중장리 소리를 ‘뼈대 있는 소리와 이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표현한다. 공주 소리판에서 ‘뼈대 있는 소리’란 가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고 박이 정확하여 어디를 가나 잘 통하는 소리이다. 그 반대의 소리는 무엇인가. 즉흥적으로 지어 부르는 소리는 ‘잡소리 사설’라 하여 공주에서는 홀대하였다. 일제강점기 까지도 그 명성이 있어 관광차 계룡산을 찾는 사람들은 중장리에서 소리꾼을 초청해 소리를 듣곤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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