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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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조선 말기에는 유서깊은 사찰의 사하촌마다 신도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배불정책과 맞물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사찰 자체적으로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승려와 신도가 함께하는 신도계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갑사의 경우 어떤 종류의 사찰계가 있었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가까운 공주의 마곡사 불량계(佛糧契), 동학사 지장계(地藏契) 등이 조사된 것으로 보아 갑사에도 비슷한 기능을 가진 계조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찰계는 신도들이 재물을 희사하여 절의 운영에 도움을 주는 식으로 운영되곤 하였다.
현재 마을에 전해지는 갑사 신도계는 앞서 말한 마곡사나 동학사의 사찰계 만큼 역사가 깊거나, 구체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고, 동네에 전해지는 이야기 정도일 뿐이다. 40여년전 사찰내에서 비구와 대처승간의 분쟁이 벌어지던 시기의 일이었다.
중장리 사람들은 계룡산에서 나무를 해 땔감으로 쓰고 있었다. 갑사의 대처승들은 대부분 절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승려와 일반주민들 너나 할것없이 한동네 사람으로 산에서 땔나무를 가져다 썼다. 마을에서 보이는 계룡산의 서쪽 능선 안쪽 일대는 대부분 갑사 소유로 되어있었지만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비구승이 갑사를 장악하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비구승 김혜원 주지가 오면서, 이것을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혜원 주지는 갑사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던 승려였는데, 당시에 보문고등학교 소유로 되어있던 토지를 소송을 통해 갑사 소유로 바꾸기도 하였다. 계룡산에서 갑사의 소유지는 ‘260정’이라고 할 만큼 범위가 넓었으므로 갑사 소유지에서 나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중장리 사람들에게 계룡산 나무를 쓰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사하촌 중장리 주민들은 절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갑사 신도계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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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소유의 골짜기
신도계에 속한 마을은 갑사동 일대로, 현재 갑사유스호스텔에서 갑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여러 마을들이 포함되었다. 지금은 거주자가 없는 황무지이지만, 그때만해도 괴목정, 행이펄, 점터, 열반당, 옻샴골, 부도골 등 여러 마을들이 모여있던 곳이었다. 신도계를 계기로 갑사와 주민들은 그동안의 갈등을 해소하며 화해하였고, 절내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일들을 서로 도우며 단합하였다. 신도계는 1980년대에 상가가 형성되면서 사라졌고 현재 상가번영회가 예전의 신도계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