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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사건에 휘말린 삼척진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D020202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성봉현

[익산에서 온 삼척진씨]

중장1리의 관문인 통미산 입구에는 주유소를 가운데에 둔 삼거리가 있다.(삼거리마을과는 상관없다.) 여기에서 갑사 방향으로 가면 중장1리삼거리마을로 들어가고, 좌측의 대전 방향으로 가면 윗장마을과 배살미마을이 있다. 배살미마을은 중장리에서 가장 전통있는 삼척진씨의 터전이다. 삼척진씨계룡면 열두대장의 대표적인 세 성씨중의 하나로, 1500년대 후반에 진응린(陳應麟)[1547~1608]이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공주시 계룡면에서 전통있는 대표성씨는 변씨, 진씨, 정씨가 있다. 모두가 열두대징이의 성씨들이다. 삼척진씨들의 터전은 중장리 윗장마을이었다. 처음 입향하였던 사람은 진응린(陳應麟)[1547~1608]이라고 전한다. 어떤 인연으로 중장리에 입향하였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족보를 보아도 입향사적을 추정할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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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진씨 동족마을인 윗장의 돌담길

중장2리의 농바위 옆에 있는 기와집도 진씨 집안의 고택인데, 지금은 예전의 웅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안채 건물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자리는 대대로 부자가 사는 연꽃형 명당터로 유명했다. 그 지형이 연꽃과 같아서 발복은 쉽지만, 대신 꽃이 쉽게 진다고 하여 조금은 아쉬운 집자리였다. 그러나 명당전설이 사실이었는지, 삼척진씨는 대대로 부유하게 이 지역에서 세거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함박꽃이 핀 형국이라 알려진 명당 묘자리에도 삼척진씨의 묘가 있었다. 중장리의 명당이라 알려진 곳에는 모두 진씨 집안의 집과 묘가 있었던 것이다. 진필한(陳弼漢)이 1633년 생원에 급제하고 1600년대에 공주향교 청금록에 등재된 후 여러 인물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등 조선 후기까지 삼척진씨의 향촌활동이 확인된다.

[임금이 손목을 잡아주다]

오랜 세월을 한 지역에서 세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때 번영한 가문이라 해도 후손의 대가 끊기는 일도 있고,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다른 곳으로 이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장리 삼척진씨가 역시 한때 역모사건에 휘말려 하마터면 큰 일을 당할뻔한 적이 있다. 역모사건 중 하나는 정조실록의 의심스러운 기사 1건이고, 또 하나는 가문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1785년(정조 9). 충청도 일대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역모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태안, 한산, 대흥, 당진, 면천, 공주 등 지금의 충청남도 전체가 거론 되었던 큰 사건이었다. 이때의 기록이 남아있는 정조실록을 보면 계룡산 갑사 적멸암(寂滅庵) 후이방(後珥房)에 살던 중 벽규(碧奎)와 대장리(大庄里) 사람 ‘진규’가 이 대규모 역모 관련자들 중 하나였음이 밝혀져 있다. 이들에 대해 어떤 처분이 내려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삼척진씨가에서 말하는 억울한 역모사건은 또 다른 것이다. 영조조에 일어난 사건인데 충청도관찰사 심풍지가 재임 중 일때의 일이었다. 중장리 진동철(陳東喆)과 그의 아들들인 진양호(陳養浩), 진양로(陳養老)가 역모 사건에 연관이 있다는 상소가 들어와 왕이 격노하며 진상을 밝혔는데, 이것은 무고로 밝혀졌다. 영조가 친히 진동철 부자를 불러들여 죄가 없음을 밝히며 손목을 잡아주었고,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관찰사 심풍지를 파직시켰다. 진동철은 고향으로 돌아와 왕의 손길이 닿은 손목에 비단을 두르고 살았다 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솔아티의 야산은 박씨네 산이었다가 이무렵 진씨네 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양자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무고사건의 원인에 대한 전설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후손들은 좋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쨌든 삼척진씨 가문은 한 동네에서 십수대를 이어오는 동안 대체로 좋은 평판을 들어왔다. 가난한 사람이 묘를 쓰지 못해 쩔쩔매면 흔쾌히 집안의 산에 묘자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는 이야기가 동네에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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