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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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계룡산은 백제시대부터 나라를 지키는 명산이라는 대우를 받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산의 모양새가 금닭이 알을 품고,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각각의 글자를 따 ‘계룡’이라 한 것인데 백제가 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국가에서 제사를 올리는 산이었고, 유교주의가 지배한 조선시대에까지도 국가적으로 정성을 들인 곳이었다. 그런 역사속에 갑사가 들어섰고, 갑사의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증명하기가 어렵지만)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적어도 웅진백제 시기에 중장리에 사람들이 머물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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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누가 먼저 살기 시작했는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마을은 언제 만들어졌는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을의 지형과 지명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보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은 배산임수의 남향한 낮은 구릉지대였다. 현대로 올수록 마을이 형성된 자리는 점점 평지로 내려왔으니 옛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대장골의 중상단부인 중장 1, 2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웃한 중장 2리에는 선돌이 세워져 있고 고분군과 산성 터가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선돌은 청동기시대 즈음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장2리의 고분은 오미마을 서쪽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대형 바위를 깔고 벽 둘레에 작은 돌을 쌓았으며 남쪽 벽만 한 장의 돌문으로 막아둔 백제시대 고분이었다. 성뚜루미산의 산성 터에는 백제시대 산성에서 주로 보이고 있는 건물지와 웅덩이 흔적 등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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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뚜루미산
중장1리에서는 그런 유적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네 주민이 밭을 갈다 토기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 토기는 검은색의 작은 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측된다. 선돌과 고분, 산성, 그리고 토기 등을 두고 보면 중장리에는 백제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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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