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301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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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대연 |
[백제조각원 설립배경]
내산리는 자연 속에 동화되어 예술혼을 불태우는 조각가들이 살고 있다. 마땅한 작업장이 없어 고심하던 조각가들은 폐교를 작업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연락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 든 사람들은 동양화와 서양화에서부터 판화, 도자기 등 전공분야도 다양했다. 특히 석재조각은 기본적으로 무거운 장비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넓은 면적이 아니면 안 되었다.
폐교된 학교를 조각장으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해오던 이들은 박물관이 들어서면서 조각장을 떠나야 했지만 신동수 씨와 박성우 씨는 아직도 내산리에 남아 억척스런 고집으로 조각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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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 - 백제조각원
백제조각원 을 설립한 신동수 씨는 3년간 운영하던 미술학원을 마무리하고 내산리에 작업장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가 내산리에 들어 온 이유는 동료 조각가들과 함께 생활하며 주고받은 예술적 감동에 대한 추억이 이곳으로 다시 오게 했다고 한다. 시골집을 임대하여 개조한 허름한 작업실이지만 희망과 포부는 남달랐다고 한다. 조각가가 개인 작업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몰랐다. 어려운 살림살이지만 자신과 같은 입장에 처해있는 후배나 제자들을 위해 백제조각원을 설립한 것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만으로 뭉친 사람들에게는 늘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라 다녔다. 즉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뚜렷한 직장도 없으면서 조각만을 고집하다 보니 생계가 가장 난감했다. 그리하여 백제조각원에서는 구성원의 작품 활동과 대리조각품 제작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늘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포기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내면에서 일렁이는 작업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런 것이 이른 바 천직이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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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수 조각가와 박성우 조각가
[마을사람들과의 어울림]
백제조각원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과 마을회관 판석 등 이곳저곳에 백제조각원에서 만든 작품이 눈에 띄지만 이러한 노력보다 더 중요한 동질적 요소가 있었다. 마을 어르신의 말씀을 빌리자면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한다’(同氣相求同聲相應 語在論語)는 이치이다. 마을 사람들의 풍물에 대한 관심과 조각가들의 예술성 사이에 무언의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굉음을 울리는 돌 가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법도 한데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없다. 농사일에 전념하다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풍물을 연주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돌 가는 소리가 무슨 대수냐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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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조각가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동수·박성우 씨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마을회와 청년회에 참석하여 마을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 각종 마을잔치는 물론 내산리를 대표하는 체육대회에 참가해서도 마을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두드러진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농촌마을은 아직까지 장례풍습이 남아 있는데 출상에서 장지까지 상여를 메는 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발뺌하는 일이 없었다. 상여를 짊어질 젊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