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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의 제자 최우량의 침술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2020004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대연

내산리에는 오래전부터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살고 있다. 이 강화최씨는 죽산에 거주하던 최순(崔淳)의 셋째 아들인 덕준(德峻)이 예안김씨의 사위가 되면서 전주이씨의 뒤를 부전동에 입향하였다. 그런데 이 최덕준의 고손자인 최우량은 허임에게서 침술을 배워 유명해졌다. 최우량[1599~1671]은 강화최씨 족보에 벼슬이 부사과(副司果, 종6품)에 이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활약상은 승정원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인조 19년(1641) 내의원이 인조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 “공주에 사는 최우량이 허임에게서 침을 배웠는데 그 의술이 매우 뛰어났다.”는 기록이 등장한다.(『승정원일기』 인조 19년 5월 19일.) 최우량은 공주에 사는 유학(幼學), 즉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이었다. 허임에게서 침을 배운 그가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재신 중에서 창증이 심한 사람이 있어 침을 놓자 곧바로 효과가 있었다. 최우량은 바로 다음날인 5월 20일 오위(五衛)에 속한 종9품의 무관직(武官職)인 부사용(副司勇)의 관직에 제수됐다(『승정원일기』 인조 19년 5월 20일.) 그 후에도 최우량은 내의원 침의로 활동하는 기록이 이어진다.(『승정원일기』 인조 21년 10월 15일.) 효종 7년(1656) 7월 14일에는 부사용으로 다시 관직이 제수되는 기록이 있고(『승정원일기』 효종 7년 7월 14일.), 효종 9년(1658) 7월 27일 경외(京外)의 침과 약에 뛰어난 사람들을 초치(招致)하는 문제에 대한 내의원 도제조의 계에도 여러 침의들의 이름과 함께 거명된다(『승정원일기』 효종 9년 7월 27일).

최우량은 『산림경제』에서도 침의(鍼醫)로 거론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최우량(崔宇量)이 일찍이 말하기를, “아들 재삼(在三)이 두질(痘疾)에 걸려 위중(危重)하므로 주사(朱砂)와 용뇌(龍腦)를 평양으로 구하러 보냈는데 약이 채 도착되기 전에 죽었고, 아들이 죽고 얼마 후에 약이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주사 콩 크기만큼과 용뇌 콩 반만큼 크기를 물 한 종발에 타서 죽은 아이의 입 안에 부어주니 얼굴색이 점점 붉어지며 호흡이 통하고 흑함(黑陷)이 모두 일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하였다.《잠담》(『산림경제』권3, 救急痘瘡經驗方 鍼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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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량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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