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201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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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빈 |
부전동의 지세와 형국으로 보아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문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부전동에 살았던 주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선초기부터이다. 태종조에 당진감무를 지낸 예안김씨 김숙량(金叔良)이 확인가능한 부전동 최초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입향동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마 김숙량이 공주이씨를 후처로 맞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숙량에게는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큰 아들인 신(新)은 146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수관을 역임하고 낙안군수와 응교를 지냈다. 둘째 아들인 지(祗)는 145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즉위 후에는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예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셋째 아들인 비(秕)는 중앙 진출을 하지 않고 공주 지역에서 사족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3형제는 모두 부전동에 묻혔다.
신(新)에게는 수손(首孫)과 미손(尾孫)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특히 수손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현달하였다. 그는 145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76년에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성균대사성 전주부윤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는데, 그의 후손들은 뒤에 설명하는 부전대동계의 성립을 주도하고 있다. 수손의 아들인 사창(泗昌)은 옥과현감을 지냈으며, 손자인 반천(半千)은 153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사서 수찬 교리를 거쳐 승정원승지에 이르렀다. 반천의 아들인 해(澥)는 156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양사와 춘추관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상주목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1593년 3월에 순직하였고, 그 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미손의 후손은 목천으로 이주하여 부전동에 살지 않았다.
숙량의 둘째 아들인 지의 후손은 큰 아들인 신의 후손에 비해 중앙 진출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중앙 진출보다는 오히려 향촌에서의 사족활동이 주목된다. 지에게는 옥견(玉堅), 철견(鐵堅), 벽견(璧堅), 석견(石堅)이라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옥견, 철견, 벽견은 공주향안에 올라있다. 이 4형제의 후손 중에서 부전동에 세거하는 사람들은 셋째 아들인 벽견의 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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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손 신도비
예안김씨가 부전동에 정착한 이후 전주이씨, 강화최씨, 충원지씨 등이 차례로 부전동에 이주해 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예안김씨의 사위가 되거나 외손사위가 되면서 부전동에 입향하였다. 부전동 예안김씨의 사위 중에는 무오사화에서 희생된 이목(김수손의 사위), 김일손(김미손의 사위) 등도 있었다. 예안김씨는 조선말기가 되면 거의 부전동을 떠나가고, 오늘날에는 거의 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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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김씨 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