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3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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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昆支 |
이칭/별칭 | 좌현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정재윤 |
[정의]
삼국시대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로 백제의 좌현왕과 내신좌평을 역임한 왕족.
[개설]
곤지(昆支)[?~477]는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과 22대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이자 24대 동성왕(東城王)과 25대 무령왕의 아버지이다. 한성기 좌현왕(左賢王)에 임명되었으며, 461년(개로왕 7) 왜국에 파견되어 가와치[河內] 지역에 정착하였다. 백제계 이주민을 규합하여 백제와의 군사 동맹에 일조하였으며, 477년(문주왕 3) 귀국하여 내신좌평으로 임명되었지만 3개월 후에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다.
[활동 사항]
개로왕은 458년(개로왕 4) 송에 국서를 보내 11명의 신하에게 내린 관작을 허가해 주길 요청하였다. 이때 곤지는 좌현왕의 작호를 받았다. 우현왕에 이어 두 번째로 열거되었지만 통상 좌현왕이 서열상 위이기 때문에 개로왕 초기 정권의 핵심 인물임을 나타내 준다. 461년 곤지는 형인 개로왕의 명에 의해 왜에 파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략적 추방설도 있지만 고구려와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군군(軍君)’이라 불린 그를 파견해 군사적 협력 관계를 강화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목적이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곤지가 정착한 곳은 왜의 수도인 야마토에서 70여㎞ 정도 떨어진 가와치 지역이었다. 이곳은 백제계 도왜인의 밀집 거주 지역임과 동시에 야마토국의 수도로 가는 요충지였다. 곤지는 대략 16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가 머문 시기와 정착한 곳을 고려하면 단순한 군사적 협력 관계라기보다는 백제계 사람들을 규합하여 야마토국의 국정 장악에 협력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가와치 지역은 이곳에서 태어난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곤지가 다시 등장한 것은 477년 3월이다. 문주왕은 권신 해구의 발호로 인하여 위기에 처했는데, 곤지를 왕을 보좌하는 내신좌평에 임명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다만 곤지의 위험성도 충분히 감지하여 동시에 아들인 삼근을 태자로 임명하여 그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구와 문주, 그리고 곤지라는 정치적 역학관계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곤지가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돌연사한 것은 이를 말해 준다. 곤지의 죽음에 앞서 불길함을 암시하는 흑룡(黑龍)이 나타났다는 일화는 그의 죽음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