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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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菴集 |
영어의미역 | Posthumous Works of Younga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원철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은거한 문신 정달영의 문집.
[형태]
『영암집(寧菴集)』은 2권 1책이다. 장정법은 선장본이다. 광곽은 사주쌍변으로 반곽 크기는 가로가 16.5㎝이고, 세로가 22.3㎝이다. 행수는 12행이고, 한 행의 자수는 25자이다.
[구성/내용]
서문은 정달영(鄭達泳)[1828~1891]의 4종손(四從孫) 정헌태(鄭憲泰)가 썼고, 발문은 정달영의 재종손(再從孫) 정헌극(鄭憲極)이 썼다. 권1은 오언 율시 13수, 칠언 율시 17수, 서(書) 29편, 서(序) 1편, 상량문 1편, 명(銘) 2편, 행장 1편, 권2는 제문 22편, 고축(告祝)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에는 기(記) 1편, 행장 1편, 서(序)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내용은 자연 경물을 읊은 것이 드물고, 대개는 회갑 등과 같이 대인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들로서 차운(次韻)이나 화운(和韻)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특히 시제가 다른 경우에도 동일 운자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정달영이 스승으로 모셨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및 동문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19세기 말 공주 북부 지역인 사곡, 정안의 산골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때, 이들과 사우 관계로서 함께 수학하며 도의를 연마한 연고로, 정달영의 글 역시 이와 연관되어 지어진 작품들이 중심을 이룬다.
예를 들면, 「성전옥정명(星田玉井銘)」에서는 스승인 임헌회가 공주로 이거하여 성전리에 터를 잡았으나 물이 없었는데, 임헌회가 대문 밖에 노을이 어린 듯한 기운을 보고 그곳을 파서 좋은 물을 얻었다는 일화를 밝히면서 스승의 덕과 맑은 샘물을 칭송하였다.
스승을 추모한 글 「제고산임선생(祭鼓山任先生)」에서는 “선생께서는 우주 사이에 드문 기질을 받은 분입니다/ 기운은 호걸의 자질을 받으셨고/ 학문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현묘한 이치를 관통하셨습니다/ 이기(理氣)를 논하시면 근원을 환하게 볼 수 있고/ 학문을 말씀하시면 체를 밝혀 적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벼슬에 나가면 황제에게 훌륭한 계책을 올리시고/ 물러나시면 후인들을 도와 깨우치셨으니/ 그러므로 선생의 한 가지 말씀이나/ 침묵 또는 하나의 행동이나 멈춤 사이에도/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았습니다.(先生宇宙間氣也 氣稟豪傑之才 學貫天人之玅 論理氣則洞見大原 道學文則明體適用 出可以謨猷皇王 處可以佑啓後人 然則先生之一語 一默動靜之間 所係亦不輕矣)”라 하여 스승을 존숭하는 지극한 마음을 드러냈다.
또한 당시 학자들 간에 논쟁이 되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따라, 그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외암 이간(李柬)과 남당 한원진(韓元震) 두 분 문하들 사이에서 서로 변론하였으니, 후학들이 감히 가볍게 논의하여서는 안 되나, 삼연 김창흡과 외암의 논리가 같으므로 선사(스승 임헌회)께서 외암의 학설을 따른 것이며, 나 또한 스승의 주장을 따른다.(巍南兩門 互相辨論 後學不敢輕議 而三淵巍巖論理同 故先師從巍翁說 吾亦從先師所主矣)”
[의의와 평가]
『영암집』은 수록된 글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스승을 존경하고 벗들을 친애하는 도리를 밝힌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들어 기호학파(畿湖學派)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접해볼 수 있는 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