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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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山里立石-階伯將軍傳說 |
영어의미역 | Legend of Namsan-ri Menhir and General Gyebae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종익 |
성격 | 입석유래담|계백장군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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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계백장군|병사|이웃마을 젊은이 |
관련지명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 |
모티프 유형 | 계백장군의 이적|기자정성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입석 이야기이자 계백장군 이야기.
[개설]
「남산리 입석과 계백장군 전설」은 기자신앙과 계백의 이적을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남산리 입석은 바로 기자석(祈子石)이므로 여기에다 지성을 드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를 기자정성(祈子精誠)이라고도 하는데, 자식을 낳기를 바라고 정성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채록/수집상황]
2006년에 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의 전통마을』5에 실려 있다.
[내용]
옛날 백제의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면서 탄천면 남산리에서 칼을 갈았다. 그는 칼을 다 간 뒤 부처모링이(모롱이)에 서 있는 돌을 베었다. 돌은 장군의 칼에 무처럼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를 본 백제의 병사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수가 워낙 많아 패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황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한 병사가 장군이 돌을 벤 장소인 부처모링이를 잊지 못하고 찾아와 초막(草幕)을 짓고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가문의 대를 이을 생각으로 입석 앞에 무릎을 꿇고 계백장군에게 아들 점지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얻었다. 이후 기자석(祈子石)으로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아들을 빌고, 또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9대 독자도 있었는데 이곳에 치성을 하여 아들 셋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웃 마을의 젊은이가 부처모링이를 지나가다가 입석을 손가락질 하면서 비웃었다. “저까짓 돌덩어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일을 만든단 말이여. 다 말쟁이들의 장난이지.” 이런 일이 있은 후 그 젊은이는 손가락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겉은 멀쩡한데 아프기만 하였다.
의원을 찾아갔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점쟁이가, “왜 부처님한테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한 것이여.”라고 본 듯이 말하였다. 젊은이는 부처모링이 앞에 찾아가 고사하고 자신의 무례함을 뉘우쳤다. 그랬더니 손가락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가 고사를 지낸 정월 초이레부터 열나흘까지 개인별 고사를 지냈다. 그리고 정월 보름에는 이곳 남산리 입석 앞에서 마을의 대동고사를 지냈다.
[모티프 분석]
「남산리 입석과 계백장군 전설」의 주요 모티브로는 계백장군의 이적(異蹟), 기자석인 입석, 대중의 기자정성, 젊은이 비난과 득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이 서로 연계되어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특히 기자정성은 남아선호 사상에 빠진 여인들이 옛날부터 현대에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오는 관심 사항의 하나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지정이면 감천이라면서 ‘기자석’, ‘명산대천’, ‘성황당’ 등에게 치성을 드려 효험을 얻기도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