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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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s to Hyangdeok's Devotion to Parents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76-6 일원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용혁,박범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12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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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4년 5월 17일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에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
성격 | 정려비 |
건립시기/일시 | 755년![]() ![]() |
관련인물 | 조영국(趙榮國)|이덕현(李德顯)|오막(吳幕)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60㎝ |
너비 | 43㎝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76-6 일원![]() |
소유자 | 공주시 |
관리자 |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에 있는 통일신라 때의 효자 향덕의 정려비.
[개설]
향덕은 조선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효자로서 가장 먼저 수록된 인물이기도 하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열전」에 따르면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공주시 소학동 일대] 사람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선(善)이고, 자는 반길(潘吉)이었다. 향덕은 효성스럽고 유순하여 당시에도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는 1982년 12월 3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에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다.
[건립경위]
755년(경덕왕 14)에는 심각한 기근이 신라 전국을 휩쓸고 전염병까지 나돌았다. 부모 공양이 막연해지자 공주 판적향에 살던 향덕은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신라 경덕왕은 향덕의 효행이 보고되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벼 300곡(斛)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등의 포상을 내림과 함께 비석과 정려를 건립할 것을 명하여 그의 효행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가리(孝家里)라고 하였다.
경덕왕 때 세워진 비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후대에 중건된 비석 2기가 남아 있다. 비석 1기는 상당부가 떨어져 나가 하단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중건된 것이다. 다른 1기의 정려비는 최초의 명정 이후 987년이 지난 1741년(영조 17)에 관아의 서리 오막(吳幕)이 다시 세운 것이다. 당시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조영국(趙榮國)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1980년에는 공주군수가 정려비각 옆에 ‘효자향덕행적비’를 세웠고, 이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위치]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는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76-9번지 일원에 있다. 공주시 옥룡동에서 대전으로 가는 구 국도로 나아가다 논산 방면의 구 국도에서 꺾어져 약간 더 나아가면 국도변 오른쪽에 있다.
[형태]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는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하단부만 남아 있는데 앞면에 ‘지려(之閭)’라는 글자가 남아 있어 정려비임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축삼월일중립(丑三月日重立)’이라 하여 건립의 시기가 새겨져 있지만, 역시 윗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건립 시기는 불명이다. 한편 공주 소학동 효자향덕비 옆에 1741년(영조 17)에 세운 새 정려비가 있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비석의 옆에는 원형의 주좌(柱坐)를 갖춘 통일신라기 양식을 가진 2매의 초석이 있다. 경덕왕 당대의 정려 초석일 가능성이 있다. 초석의 크기는 1변 52㎝, 62㎝으로 약간 차이가 있으나 기둥 자리의 지름은 45㎝로 동일한 크기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60㎝, 비신의 폭 43㎝, 두께 12㎝이다.
[금석문]
1741년(영조 17)에 세운 정려비의 앞면에는 “지극하여라, 효자여/ 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 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 마을이 효자로서 이름났으니/ 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允矣孝子 克全彛性 旣□其股 亦厥□□ 王庸是嘉 爾田爾宅 地以人名 百世不朽)”라는 시가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신라시대의 효자에 대한 정려비로서, 조선시대에 다시 건립된 것이지만 효행 정려의 선례를 기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변에 잔존한 신라시대의 초석과 절단된 구비도 주목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