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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69
한자 叩諫院址
영어의미역 Goganwon Sit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동1길 39[추계리 47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현정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7월 26일연표보기 - 고간원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5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고간원지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성격 사당
건립시기/일시 조선 중기
정면칸수 1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동1길 39[추계리 471]지도보기
관리자 남평문씨 종중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에 있는 고려 중기의 문신 충숙공 문극겸(文克謙)[1122~1189]을 기리는 유적.

[개설]

공주 유구역 인근에 있는 고간원은 고려 후기의 충신 남평문씨 문극겸의 충간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그러나 건립 시기나 건립 배경, 건립 주체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대강의 상황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792년(정조 16) 홍수로 무너진 건물을 1907년에 다시 지었고, 1914년에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유구읍 소재지인 유구리에서 아산 방향 국도 39호선을 따라 8㎞ 정도 가면 고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길로 500m쯤 가면 고간원이 있다.

[변천]

고간원(叩諫院)’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의종에게 직간(直諫)을 하였던 문극겸의 충의를 백이(白夷), 숙제(叔齊)의 ‘말의 고삐를 붙잡고 간언하던 ((叩馬而諫)’ 고사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다. 고간원이라는 편액에는 백이, 숙제에 비교할 만한 문극겸의 충간(忠諫)을 숭모하는 후인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고려 고종 때의 문신 최자(崔滋)[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의하면 1173년(명종 3) 겨울 유구역에서 공관(公館)을 수리하고, 화공(畵工)을 불러 벽에 채색을 하도록 하였다.

공인(工人) 박씨는 한쪽 벽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삿갓을 쓰고 말 위에 올라타 산길을 따라 천천히 가고, 하인들이 힘없이 따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인 1220년대에 송광사(松廣寺)의 무의자(無衣子)라는 승려가 금(金)나라가 고려 의주(義州)를 침입하자 승병(僧兵)을 인솔하여 서경(西京)으로 가는 길에 유구역에 머물렀다고 한다. 무의자는 탄식하면서 그림을 응시하더니 “이것이 바로 간언하던 신하가 서울을 떠나는 그림이로구나.” 하고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문극겸의 충성과 그의 시에 그림을 그렸던 화공, 이 그림을 알아본 무의자의 비범함에 감탄하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고간원의 창건 연대를 알기는 어려우며, 훨씬 후대의 기록인 『충숙공사실기(忠肅公事實記)』에 따르면 조선 태종 대에 문극겸의 묘 아래에 왕명으로 고간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 기문은 1590년(선조 24)에 지어진 것으로, 「간신거국도」와 벽에 쓰여진 시,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음을 말하면서 그 내용의 대략을 간추리고 있다. 더불어 수령에게 고하여 이 시들을 판에 새겨서 오래 전하도록 했다.

1617년(광해군 9) 생원 최진명(崔振溟)이 쓴 「고간원발(叩諫院跋)」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현재 고간원의 현판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입어서 새겨 걸었던 기문과 시들이 불에 탔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기문 모두 고간원의 창건 연대를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두 편의 글을 보면 역원과 고간원과의 관계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충숙공사실기』의 「고간원이력(叩諫院履歷)」에서는 1792년(정조 16) 홍수에 원사가 무너졌고, 1851년(철종 2)에는 앞면의 원판을 새롭게 새겨 유구역 누벽에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907년에 원우를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14년에 완성하였고, 여기에 편액과 제현의 시문 현판들을 안치시켰다고 한다.

1876년 문중에서 재실인 모선재(慕先齋)를 지었으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1914년 후손 문정찬(文貞燦)이 주도하여 고간원을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중수 사실은 고간원 내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는데, 1957년에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중수하였고, 1978년 금강재를 건립하고, 충숙문공 신도비를 세웠다.

[형태]

고간원은 맞배지붕을 갖춘 익공 계통의 건물로 원래는 영당이었으나 현재는 정각으로 축소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되어 있는 고간원 정면에는 ‘고간원(叩諫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팔각고주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사면은 홍살로 처리하고 양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정각 안에는 여섯 개의 현판들이 걸려 있다.

[현황]

고간원 뒤에 있는 문극겸의 묘소와 재실을 포함한 고간원지는 1984년 7월 2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1987년부터 1989년에 걸쳐 새로 단장하였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쳐 잘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간원지유구역의 변천사와 관련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공주에 살고 있는 남평문씨의 문중 활동과 연관된 유적으로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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