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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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狷祠宇 |
영어의미역 | Shrine of Jo Gye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보흥리 67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현정,박범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6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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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4년 5월 17일 - 조견 사우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8호에서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
성격 | 사우 |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보흥리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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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보흥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인 조견을 모신 사당.
[개설]
조견(趙狷)[1351~1425]의 자는 거경(巨卿), 호는 송산(松山)이다. 시중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덕유(趙德裕)이다. 조선 전기 영의정까지 오른 조준(趙浚)의 동생이기도 하다. 조견은 어릴 때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하였다. 이후 벼슬을 시작하여 좌윤(左尹)에 임명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다. 조견은 안렴사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울며 두류산에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태조 이성계가 그의 절개를 칭찬하며 호조전서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옛 친구의 입장으로 태조가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사로 갔음에도 조견은 두 사람과 만나기를 거절했다. 이와 같은 일화를 통해 조견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견은 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는 형 조준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져 세종 대까지 관직에 있었다. 1425년(세종 7) 75세의 나이로 조견이 죽자 왕이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주었으며, 장례를 도와주었다.
[위치]
공주시에서 청양으로 가는 국도 36호선을 따라 15분 정도 달리다 보면 우성면 보흥리가 나온다. 보흥리 보적골 경덕산업 옆에 있다.
[변천]
원래 조견을 제향한 사당은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로서, 양주 지역에 있었으나, 후손들이 공주로 이거하면서 사당을 함께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1811년(순조 11)에 조견의 손자 조청로(趙淸老)와 그 아들 조영서(趙榮緖) 부자가 계유정난 때 순절한 공으로 받은 조청로의 정려 현판도 사우 이건 때 아산 신창에서 옮겨 와 보관하다가 1965년 정산에 비만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견 사우는 1943년 중수를 거쳤으며 최근 대대적으로 보수를 하였다.
[형태]
조견 사우가 보수되면서 맞배지붕의 건물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고식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담장은 시멘트 블록으로 쌓았으며, 삼문은 가정집의 철문으로 대신하고 있다.
[현황]
조견 사우는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평양조씨의 후손들이 조견 사우를 아산 신창에서 공주에 이거한 후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또한 당시 우성면 보흥리 지역에서 평양조씨의 위상과 권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