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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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任 |
영어음역 | Heo Im |
영어의미역 | Heo I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한의.
[가계]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에 의하면 허임은 하양허씨 문경공파 21세손으로 허락(許珞)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허임은 어렸을 때 부모님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의술에 눈이 틔었다고 한다. 1593년 약관의 나이에 침의로 발탁되어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일행을 수행하며 침 치료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침술치료효과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여러 번 받았다.
출신 성분을 뛰어넘는 인사 조치에 대한 관료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반(東班)의 위계(位階)에 이르렀고 경기 지방의 요지에 수령으로 제수되기도 하였다. 1604년 9월 야간에 발병한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6품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1612년 광해군 4년 임진왜란 중 선조를 시종한 공을 인정받아 3등 공신으로 되었으며, 허준과 함께 의관록에 기록되었다.
이후 영평현령, 양주목사, 부평부사를 거쳐 남양부사에 특별히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그는 어미와 함께 사는데 궁핍하여 생활할 수 없는 처지”라고 걱정할 정도로 청렴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1623년(광해군 15) 의관들이 임금의 하교를 외부로 누설시켰다는 이유로 감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 이후로 20여 년간 실록에 허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감봉 사건 20년 후인 1644년 허임의 70대에 이르러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이 간행되었다. 허임은 자신의 임상 경험을 후대 사람들이 널리 활용하기를 기대하였는데, 『침구경험방』의 여러 판본이 간행되어 허임의 기대는 많은 부분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침구경험방』과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가 있다.
[묘소]
허임의 묘는 원래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 있었으나, 1981년에 부모 묘소와 아들의 묘소가 있는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