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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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民川永世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 서문 입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성격 | 공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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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817년(순조 17) |
관련인물 | 강신환 |
높이 | 110㎝ |
너비 | 45㎝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1-1 공산성 서문 입구 |
소유자 | 공주시 |
관리자 |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의 서문 입구에 모아 둔 공적비 중의 하나.
[개설]
제민천 영세비는 공산성 서문 입구에 있는 43개의 비석들 가운데 하나이다. 제민천 영세비는 공주의 제민천과 제민천에 놓였던 교량의 중수에 대한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별하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제민천은 금학동의 남쪽 지막골에서 발원하여 공주시내를 관통하여 북으로 흘러 정지산을 돌아 금강으로 이르는 샛강이다. 제민천 교량은 중동에서 봉황동으로 통하는 목에 놓여 있었다고 추정된다.
[건립경위]
1817년(순조 17) 여름 대홍수로 제민천이 범람하고 교량이 붕괴되자 백성들은 그 수리를 원하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3천여 금이라는 막대한 액수로 백성들에게 거둘 수 없는 매우 많은 돈이었다. 이에 비변사에 보고하여 충청수영의 군자미를 얻고 자체자금과 부여와 연기의 공전을 합하여 사업의 자금을 겨우 마련하였다.
이 다리의 복구는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쌓는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의 지원에 협조한 강신환 등 원납인 10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두었다.
[위치]
공주시청에서 공주고등학교를 지나 옛 공주시내버스터미널 방면으로 약 3㎞를 가면 공산성의 입구가 나온다.
[형태]
제민천 영세비의 비신 높이는 110㎝이고 폭 45㎝로 되어 있다.
[금석문]
‘제민천교명(濟民川橋銘)’ 및 ‘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라 표제되어 있으며, 이 비를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하여 새겨져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의 지원에 협조한 강신환 등 원납인 10인의 이름을 비문에 적어 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현황]
공산성 서문 입구의 우측에는 43개의 비석이 일렬로 정리되어 있는데 원래 공주시내에 산재했던 조선시대 비석들을 모은 것으로, 국립공주박물관 입구에 있던 것을 이곳에 다시 옮겨 놓은 것이다. 대체로 19세기의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민천 영세비는 이 비들 중의 하나이며, 대부분의 비들은 송덕비와 공덕비들이다.
또한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민천 영세비는 제민천과 제민천에 놓여 있던 교량을 중수하기 위해 당시 고을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하나의 교량을 중수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자금이 필요하고,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썼던 방법들도 알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자금의 일부를 댄 사람들의 명단을 통해 당시 고을의 실세를 추측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