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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600
한자 吳始壽神道碑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for O Sisu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도비
건립시기/일시 1694년[신도비]연표보기|1709년[묘비]연표보기|1810년[신도비]연표보기
관련인물 오시수
재질 화강암
높이 우측비 243㎝|좌측비 149㎝
너비 우측비 124㎝|좌측비 55㎝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 지도보기
소유자 동복오씨 종중
관리자 동복오씨 종중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8호
문화재 지정일 1997년 6월 5일연표보기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에 있는 오시수의 신도비.

[개설]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남동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石碑)를 말한다. 오시수 신도비는 두 기가 존재한다. 우측의 비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것이고, 좌측의 비는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추탈되었던 오시수(吳始壽)[1632~1681]의 관작이 1784년(정조 8)에 신원·복관되자 오시수의 증손인 오석명이 1810년에 세운 것이다.

[건립경위]

오시수의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이다. 오시수는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4년(현종 5) 사복시정(司福寺正), 평안도암행어사를 역임했고 1674년에는 도승지가 되었으며, 숙종 대에 우의정을 지내기도 했다. 오시수는 동복오씨가 공주 월굴로 입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당시 동복오씨는 전성기라 칭할 만큼 번창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에 따라 동복오씨의 위상도 변화하였다.

오시수는 1680년 경신환국에 연루되어 귀향을 갔다가 1681년 사사되었으며, 이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관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로 오시수의 관직이 다시 추탈되고 동복오씨의 정치적 수난은 계속되어 결국 공주로 입향하여 정착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런 배경 속에 오시수의 우측에 있는 신도비가 1694년 세워졌으며, 좌측의 비는 1694년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추탈되었던 오시수의 관작이 1784년(정조 8)에 신원·복관되자 오시수의 증손인 오석명이 세운 것이다.

[위치]

공주시에서 우성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9㎞를 가면 우성면소재지에 조금 못 미쳐 도로변의 우측으로 보이는 열녀 오씨 정려가 보인다. 이 정려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소도로를 따라 월굴로 가다보면 오백령 사우가 나타난다. 신도비는 이 사우와 함께 있다.

[형태]

신도비는 나란히 두 기가 존재한다. 우측에 있는 비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243㎝, 폭 124㎝, 두께 54㎝, 자경은 2.5㎝ 정도이다. 좌측에 있는 비는 1810년(순조 1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149㎝, 폭 55㎝, 두께 39.5㎝이다. 이 두 개의 비는 비대와 지붕[옥개]형의 비개를 갖춘 동일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금석문]

오시수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월굴에 오시수를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우측에 있는 비는 오시수의 아들 오상유 장인인 우의정 민암(閔黯)이 찬(撰)하고 전주부윤 박경후(朴慶後)가 서(書)하였으며, 대사간 이서우(李瑞雨)가 전(篆)하였다. 좌측의 비는 오시수의 증손인 오석명이 장령 정종노(鄭宗魯)에게 부탁하여 비문을 짓고 1810년(순조 10)에 세웠다.

[현황]

오백령 사우와 함께 있으며, 월굴 뒤 구릉에는 오시수의 묘소와 오시수의 부친 오정원의 묘가 함께 있다. 현재 자손들에 의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오시수 신도비를 통하여 동복오씨가 어떻게 공주에 세거하였으며, 어떻게 공주 내에서 사족 가문으로서 위상을 이어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정치적 상황이 한 가문의 입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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