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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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Yongingwa Inyeoneul Maejeun Munsadeurui Hoehwa Hwaldong |
영어의미역 | Paintings of Literatus Connected with Yongi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선표 |
[개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회화가 문사들의 예술 장르로서 애호되었다. 시·서에 뛰어난 문사들은 자신들의 뜻과 흥취를 표현하거나 탈속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을 기본적인 교양이자 고상한 풍류로 여겼다. 이와 같이 시·서와 더불어 문인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던 조선시대 회화는 특히 문사들에 의해 창작이념과 취향이 계도되면서 중세적 감상물로서의 성격을 형성하는 특징을 지닌다.
[문인 문화의 확산지 역할을 했던 용인]
조선시대 문사들은 그림을 한적한 탈속의 상태에서 자아를 닦고 기르며 즐기는 청완물(淸玩物)로서 향유했다. 이 때문에 주거지의 서재를 비롯해 근교의 문예모임 장소나 별서, 또는 한거처에서 다양한 회화활동을 펼쳤다. 지역적으로는 왕도인 한양과 함께 그 배도(陪都)였던 경기도가 중심을 이루었다.
경기도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한양에 버금가는 문예 창작과 활동의 공간으로 각별했는데, 그중에서도 용인은 명현들을 비롯한 많은 문사들의 교거(僑居)나 은거처·장지(葬地)로서 사대부 문인 문화의 확산과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용인에는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의 창도자로 추앙되던 정몽주의 묘소와 서원이 있어 사림의 정신적 고향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림에서도 성정과 덕성을 함양하고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수양론적 회화관과 탈속적인 경향을 추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화목과 화풍 또한 묵매 등의 사군자류와 함께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나 산수인물화를 선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사림사회의 정신적 분위기나 문인들의 탈속 자오적인 취향과 부합되는 것으로, 용인 지역과 인연을 맺은 문사들의 회화활동이 비록 양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의 주류를 이룬 문인 회화관과 화목 및 화풍 전개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용인과 연고가 깊은 문사들의 감평 활동과 회화관]
『용인시사』인물편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문사 명단에서 그림에 대한 감평이나 제시, 또는 서문 및 발문을 남긴 인사는 모두 열네 명이다. 이들 제화시문 가운데 회화 인식 등에 관한 견해를 추구해 볼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는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조광조(趙光祖)[1482~1519], 허균(許筠)[1569~1618]의 감평 활동과 회화관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에서 태어나 영남 사림파에 속하지만, 용인의 교거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김일손은 자신의 시문집인 『탁영집(濯纓集)』에서, “참된 선비는 육예(六藝)를 익혀 내면에 지니면서 온갖 세상일에 능통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시·서·화 등의 육예를 익혀 내실을 기한다는 생각은 김일손의 스승이기도 한 김종직이 경술과 문장을 나누어 보던 입장을 비판하면서 육예의 학습을 통해 성숙한 인간의 위치에 이를 수 있다고 했던 견해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선비가 구비해야 할 필수 교양물로 육예를 인식한 것은 사림파와 훈구파를 불문하고 조선 초기를 통해 사대부 사이에서 교감되었던 공통된 경향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박학치지(博學致知)’적인 선비상의 추구는 새로운 왕조 건설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결부되어 대두된 것으로, 문사들의 회화활동을 촉진하는 구실로 작용하였다.
김일손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그가 1489년(성종 20) 겨울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고화 14폭을 옷을 벗어주고 구입해 왔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일손은 당시 사행에서의 ‘첫 번째 소득’으로 이 그림을 꼽았는데, 이는 이 그림이 강남 사람에 의해 그려졌고, 또 제화자들이 문장과 학식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김일손이 강남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중형인 김기손(金騏孫)의 소장품이던 『단병(短屛)』에 대해 서문을 쓰면서 “어찌 알 수 있으랴, 강남의 그림이 연경으로 와서 다시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는지”(『탁영집』권1)라고 하여 이 지역의 화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김일손이 이처럼 강남화를 각별하게 여겼던 것은 이 지역이 성리학의 발상지로 추앙되고 동경의 대상지로 여겨졌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 초기 산수화에서 ‘강남경’이 고전적 이상경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던 것도 이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손의 회화에 대한 인식은, 성종조의 신진 사류로서 그와 함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했던 강혼(姜渾)[1464~1519]이 이종준(李宗準)[?~1499]에게 부탁하여 그리게 했던 『매죽도(梅竹圖)』8폭을 보고 쓴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서화를 잘 모른다. 그래도 정신으로 그 오묘함과 회통할 수 있다. 서화와 시문은 모두 흉중에서 나온 것이다. 가슴속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찌 그 화미함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눈에 덮여 휘늘어진 가지, 달빛이 전하는 향기와 그림자, 바람에 드높아진 잎과 꽃술, 안개에 감추어진 색의 농염함을 보면, 고요하고 쇄락하고 상쾌하고 소담함에 이른다. 붓 하나의 조화로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정묘하게 나타내니, 호방하고 빼어남이 넘쳐 창생의 뜻에 도달한다. 8폭 그림 가운데 앉아 있으니 나도 모르게 중균(이종준)의 흉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김일손과 같은 문사들은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시와 글을 써넣는 것을 ‘삼절(三絶)’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애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 모두 작가의 가슴속에서 발로된다고 하는 시·서·화 일치사상과 더불어, 이를 모두 뛰어나게 구사하거나 겸비하는 경지를 높이 평가하는 삼절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시·서·화가 함께 흉중에서 이루어지고, 이를 정신으로 감득, 또는 체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북송 시절 소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강조되었던 문인화론에 토대를 둔 것이다. 김일손도 이러한 문인화론에 토대를 두고 작가의 사상이나 내적 기상 혹은 기운의 표출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가슴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찌 그 화미함을 나타낼 수 있는가”라고 하여 작가의 내적 요소를 절대시하였다. 즉 회화 창작의 첫 번째 요건으로 빼어난 기상과 고매한 인격, 학식과 같은 도덕적·학문적 온축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그림을 단순한 묘사적 매체나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시각물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사유와 수양을 사물에 의탁하여 표현해 내는 수단, 또는 도구로서 인식했음을 뜻한다. 또한 향유자의 입장에서 김일손은 “이종준의 흉중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그림을 작가의 내적 경지와의 교감과 공명을 통해 자기 계발과 수양에 보익이 되는 매체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김일손의 회화관은 강희안(姜希顔)[1417~1464]과 강희맹(姜希孟)[1424~1483] 형제를 비롯한 조선 초기 사대부 문인화가들의 ‘우의론(寓意論)’과도 통한다. 즉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하는 것을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식견을 넓히는 ‘격물치지’와, 하늘이 준 타고난 질박한 본성을 보존하고 길러서 심성을 바르게 하고 참된 성정을 육성하는 ‘존심양성’에 유익한 정신 및 덕행 수양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김일손의 수양론적 회화관은 중종조 사림파의 거두인 조광조로 계승되었으며, 오달제(吳達濟)[1609~1637]와 같은 용인 연고 문인화가들의 창작 성향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중종조 사림파의 영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인에 묘소와 묘표, 신도비 등이 있어서 양주와 함께 그의 근거지로 꼽는다. 조광조는 강은(姜濦)[1492~?]이 소장하고 있던 윤언직(尹彦直)의 『난죽병(蘭竹屛)』 8폭에 오언절구로 모두 8수의 제화시를 남겼으나 현재 7수만이 『정암집(靜庵集)』에 수록되어 전한다.
『난죽병』제화시에서 조광조는 회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직접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보면서 성정의 성찰과 바른 심성, 또는 덕성의 육성과 같은 존심양성의 측면에서 표명함으로써 수양론적 회화관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네 번째 연의 “빼어난 마음속의 생각을 그려내어 그윽한 감추어진 덕성을 닮게 나타냈네(描寓逸懷 擬取幽潛德)”란 구절은 그림을 작가 흉중의 내적 인격과 정신의 소산물로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난죽병』의 발문에, “이 제화시를 보니 선생이 항상 덕행과 도학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여, 그림을 수기물(修己物)로서 완상하고 향유했던 조광조의 수양론적 회화관에 공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사였던 허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용인에는 그를 포함한 양천허씨의 묘역이 있을 만큼 용인과 연고가 깊은 인물이다. 허균은 문장가와 비평가로도 유명하지만, 회화사에서도 선조 연간의 대표적 화가인 이정(李楨)[1578~1607]의 후원자이며, 명나라 말 서화애호풍조의 국내 유입을 앞장서 주도했던 인물로도 주목을 받는다. 그가 편찬한 『한정록(閒情錄)』은 중국 역대 문사들의 서화 수장과 감상 등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집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적으로, 이에 대한 애호풍조와 취미 활동의 확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3에서 그림을 시·서와 같은 의의를 지닌 표현물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하고, 그림에 시문을 써넣는 것을 성호사(誠好事), 즉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장과 서화를 공벽(拱璧)이나 장주(掌珠), 즉 “큰 보석이나 구슬”과 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시·서·화 일치사상과 삼절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허균이 화원화가 집안 출신인 이정과 나이를 잊은 교유를 하며 후원을 했던 것도, 이정이 단순한 직업화가가 아니라 문인화가와 같은 삼절의 내적 경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곧 허균이 그림을 기교적·감각적 소산물이 아닌, 작가의 내면적 성정의 발로이며 흉중을 반영하는 우의적 수양물로서 선호했음을 뜻한다.
허균은 조선 초기 사림파들이 향유했던 수양론적 회화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탈속물로서 자오(自娛)하고 자적(自適)하는 심미적인 매체이자 사람의 본성에 어울리는 세속 밖의 유희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를 자오하는 것은 그윽한 즐거움이자 아취 넘치는 일이며, 세상의 근심을 잊고 속진을 떨쳐 버리게 함으로써 ‘정토(淨土)’와 ‘단구(丹丘)’와 같은 낙토와 선계에 있는 듯, 정신은 복희씨 세상에서 노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허균의 탈속적·심미적인 회화 애호 취향은 명나라 말기에 일어난 문인문화 풍조와 결부되면서 17세기 한양과 근기 지역 문사들 사이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 회화 창작과 감평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용인과 연고가 깊은 문사들의 창작활동과 화풍]
『용인시사』인물편에 수록된 조선시대 문사 중에 그림에 조예가 있었던 문인화가 등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들 중 심정주(沈廷冑)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현재 용인에 묘소가 있지만, 1978년 파주에서 이장해 온 것이기 때문에 용인과 연고가 깊은 문인화가로 보기는 힘들다. 이계호(李繼祜)[1574~1646]와 조영석(趙榮祏)[1686~1761] 역시 용인 지역과의 관련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들을 제외한 이담(李澹)[1510~1575]과 오달제(吳達濟)[1609~1637], 남구만(南九萬)[1629~1711], 이재관(李在寬)[1738~1838], 남계우(南啓宇)[1811~1888]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 전기의 인물인 이담의 경우,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과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보면 서화를 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는 작품이 없어서 창작 경향과 화풍은 살펴볼 수 없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다 심양으로 끌려간 뒤 처형당한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현재 그의 유작으로 「묵매도」와 「설매도」가 전하는데, 두 작품 모두 1972년 해주 오씨 문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묵매도」는 횡관식으로 휘어진 절지형(折枝形)의 늙은 줄기와 대나무처럼 곧게 솟아오른 새 가지와의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성글게 핀 매화의 간소하면서도 고담한 모습과, 힘차고 곧은 붓질과 먹점의 효과 등은 화면에 조용한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조선 중기 묵매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은 새로운 봄을 알리는 재생의 기쁨보다,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피는 매화의 고절한 기백을 나타낸 것으로, 작가인 오달제의 덕성에 걸맞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림의 상부 별지에 숙종이 1705년에 작가의 충절을 기리며 지은 어제 찬시(讚詩)가 적혀 있고, 화면 좌측 상단에 영조가 찬문을 지어 하사한 글을 추기한 현손인 성균관대사성 오언유(吳彦儒)의 발문이 적혀 있다.
「설매도」는 매화그림으로는 드물게 바위를 전경에 두고 배치된 변각적인 구성법으로 이루어졌다. 눈에 뒤덮인 정경을 나타내기 위해 바탕을 담묵으로 선염한 외훈법(外暈法)을 구사했으며, 나무 등걸의 어두운 부분을 짙은 먹으로 강조하여 음영의 효과와 함께 설중매의 기개와 운치를 실감나게 했다. 바위 윤곽선의 비백(飛白) 처리는 원대 조맹부의 필법과 유사하고, 매화를 자연 속에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남송대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묵조의 부드러우면서도 고아한 조화와 힘차면서도 세련된 필치, 자연스러운 구도 등은 작가의 고결한 기상과 절개의 소산으로, 김일손·조광조와 같은 용인 연고 문사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사림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와도 서로 통하는 특징이라 하겠다. 기록에 의하면 오달제의 형인 오달진(吳達晉)[1597~?]은 매화를 잘 그렸다고 전하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다.
숙종대의 문신인 남구만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용인의 모현면 비담(琵潭)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조정에 큰일이 있으면 자문에 응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동국문헌(東國文獻)』·『외전(外傳)』 등에서는 시문과 서화에 능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의령남씨 종가에 남구만의 작품으로 알려진 「묵매도」 한 점이 전하고 있으나, 늙은 줄기와 가지에 구사된 묽은 먹빛의 상태와 백화를 묘사한 백묘풍(白描風)의 선묘법이 18세기 중엽 이후의 묵매화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진품 여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겠다.
『용인이씨세보(龍仁李氏世譜)』에 의하면 이재관은 용인군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8대조와 6대조가 무과에 급제하고 각각 경상수사와 전라수사를 지낸 무반 집안이었으나, 이후 여러 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관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으로 전한다. 스승 없이 그림을 배웠으나, 절로 고법과 맞아 하늘로부터 받은 솜씨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재관은 초상화와 각종 그림에 뛰어나 어용모사와 궁궐 조영 등에 선발되는 등, 방외 화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희룡을 비롯한 중서층 문인 및 협객 등과 친교하며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아, 여항문인화가로서의 성향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다루었으나, 그중에서도 문사들의 탈속·은일적인 정경을 그린 산수인물화에 더욱 뛰어났다.
소략한 구도에 축축한 붓질과 맑고 투명한 담채로 간일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화풍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서 김정희(金正喜)[1786~1856]로 이어지면서 심화되었고, 19세기의 여항문인화가들을 통해 확산된 남종문인화풍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남계우는 남구만의 5대손인 남영로(永魯)의 사촌동생으로, 용인의 남사면 창리에 묘소가 있다. 문인화가였으나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호접도(蝴蝶圖, 나비그림)는 화목상으로는 초충류에 속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길상화(吉祥畵)로 많이 다루어졌다. 남계우의 호접도들은 섬세하고 화사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쳐 세밀한 관찰에 의해 묘사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아취를 풍기고 있어, 조선 후기의 형사적(形似的) 전신(傳神)과 조선 말기의 신감각적인 장식풍이 결합된 특징을 보여준다.
남사면 창리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산수도」를 보면 남종문인화의 대표적인 탈속은일경으로 많이 다루어진 ‘소림모정(疏林茅亭)’식의 풍경도 즐겨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근경의 띠 정자는 초옥으로 바뀌었고, 원산은 선염풍으로 처리되었으며, 능숙한 붓질과 담채의 청신한 효과 등이 고아한 느낌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