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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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榮祏 |
영어음역 | Jo Yeongseok |
이칭/별칭 | 종보,관아재,석계산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필기 |
[정의]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인화가.
[가계]
본관은 함안.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또는 석계산인(石溪山人). 경기도 양지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조해(趙楷)이며, 형이 한성부우윤을 지낸 조영복(趙榮福)이다.
[활동사항]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등용되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1742년 선조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문집 『어계집(漁溪集)』을 고쳐 간행하였다. 1748년에는 숙종어진도사(肅宗御眞圖寫)의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하였다.
[학문과 사상]
홍의영(洪儀泳)의 『관아재화첩』발문에 의하면 “본래 인물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도 잘하였고, 금강산을 다녀온 뒤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냈으며, 또한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정선(鄭敾), 시인인 이병연(李秉淵)과 이웃이 되어 교유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또한 뒤에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와 그 형제들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와 영모(翎毛)에도 능하였다. 그의 화법은 대체로 윤두서(尹斗緖)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약간 가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는 이인상(李麟祥) 등에게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등 조선 후기 문인화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술 및 작품]
주변의 일상적 풍물을 소묘한 작품들을 모은 『사제첩(麝臍帖)』과 선비들이 소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장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장교도(將蛟圖)」는 뒤에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하여 전개될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하는 작품들로서 주목된다. 이밖에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와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1733년에 그린 「방당인필어선도(倣唐人筆漁船圖)」 등이 있다. 노년에 저술한 문집 『관아재고(觀我齋稿)』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