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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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筠 |
영어음역 | Heo Gyun |
이칭/별칭 | 단보,교산,성소,백월거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허균(許筠)[1569~1618]은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강원도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허균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 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엽(許曄)이며, 어머니는 둘째 부인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이복형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있으며, 동복형제로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활동사항]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으며,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文科重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선조 35)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에 원접사(遠接使)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선조 37)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 나왔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후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전라북도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쌓았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북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고,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이듬해 하인준(河仁俊)·김개(金闓)·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가 나 1618년(광해군 10)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저술 및 작품]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