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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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光祖 |
영어음역 | Jo Gwangjo |
이칭/별칭 | 효직,정암,문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증조할아버지는 조육(趙育)이고, 할아버지는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이며, 아버지는 감찰(監察) 조원강(趙元綱)이다. 부인은 첨사(僉使) 이윤동(李允洞)의 딸이다. 아들은 조용(趙容)이다.
[활동사항]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한성부 중부 행교동(현재 종로구 경운동)에 거주하였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천(熙川)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을 만나 그 문하에 들어 수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1515년에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만날 때마다 유교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때부터 국왕인 중종의 주목을 받으며 신임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하여 중종의 계비 책봉 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 등은 중종이 즉위되면서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그러자 대사간 이행(李荇)은 그들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이에 조광조는 “상소한 자를 벌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며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이행을 파직시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반정공신(反正功臣)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인이 되었다.
조광조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이어 호조·예조의 정랑을 거쳐, 1517년(중종 12)에는 교리로 임명되었고,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같은 관직에 있으면서 조광조는 향촌의 상호부조와 풍속교화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1518년에는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미신타파를 내세우며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이어 같은 해 대사헌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승진되어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직하였으며, 곧이어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였다.
이때 천거로 인재를 발탁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명을 뽑았다. 이어 김정(金淨)·박상(朴祥)·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자기 일파의 신진사류, 특히 30대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고 훈구세력을 외직으로 몰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신진세력들은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 수립에 나섰다.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으니 위훈삭제(僞勳削除), 즉 공도 없으면서 공신에 봉해진 사람들의 훈작을 삭탈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반정공신들이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진 개혁파의 주장을 중종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에 해당하는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샀다.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은 경빈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훈구파들은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에게 이를 따다가 왕에게 바치도록 하는 등 조광조에 대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훈구파 대신들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평소 조광조의 급격한 도학정치(道學政治) 주장과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중종은 훈구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조광조와 그 일파를 투옥시켰다.
결국 조광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변호로 일단 사형은 면했으나 능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억울함을 강력하게 항소했지만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으로 그 해 12월에 사사(賜死)되었다.
[학문과 사상]
조광조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써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이를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도 전에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점은 후대 사림(士林)들이 경계해야 할 점이었다.
조광조의 개혁은 훈구파의 반격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까지 이어주었다고 평가하고 높이 추앙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심곡서원 맞은편 응봉산 산자락의 남동쪽에 자리잡은 한양조씨 세장지의 상부에 안장되어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용인의 심곡서원(深谷書院), 도봉구 도봉동의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의 양현사(兩賢祠)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이이(李珥)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