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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동의 대표적인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인 강화최씨 가에는 약 30점의 고문서가 대대로 전해 오고 있다. 강화최씨는 부전동의 세거성씨이었던 김석견(金錫堅)의 사위로 입향하게 되었는데, 입향시기는 입향조 김석견의 손자 방(逄)의 출생년이 1508년(중종3)인 것으로 보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전동 강화최씨 가의 고문서로 시기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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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 사람들은 뜻을 모아 수 십 년 동안 단절되었던 걸립을 다시 일으켰다. 걸립은 공익성을 갖는 기금을 마련할 때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희사금을 받아내는 행위를 말한다. 어려운 시골살림이었기에 저마다 정성을 모아 마을잔치나 마을제사와 같은 큰일을 치뤘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 기술이 향상되고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두레는 자연적으로 소멸되었고 마을제사의 간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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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 금강비엔날레의 개막에 앞서 내외국인 작가 60여 명이 내산리를 방문했다. 이들 작가들은 금강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공주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금강비엔날레 주최 측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비엔날레의 취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농촌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외국인들에게 농촌의 정취가 묻어나는 우리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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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에 처음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성씨는 예안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전주이씨와 강화최씨, 풍천임씨, 그리고 하양허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은 점차 번성하였다. 한때 채씨들이 이주하여 새터에 자리 잡고 군수와 공주경찰서장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 내산리의 성씨를 살펴보면 다양한 성씨가 분포하는 이른바 각성바지(各姓--) 마을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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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2리에서 한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10여분을 올라가면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는 노루목전설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다. 전설의 주인공은 허씨 가문의 효자인 허흠(許欽)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루목에 있던 허지의 무덤을 이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노루의 무덤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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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동대동계는 불과 50여 년 전만하더라고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이러한 풍습을 ‘동네볼기’라고 불렀다. 구속력을 행사하는 법률보다 전통에 입각한 예법이 보다 강조되었던 것이다. 임일순 씨와 허은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동네 노인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자식의 도리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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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는 공주에서 예산(청양) 방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연미터널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길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버스는 오전에 3번 오후에 3번씩 하루에 6번 운행하며 공주시내에서 내산·한천행 버스를 타면 1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곳은 400여 년의 전통과 음악을 간직해온 마을로 예전부터 ‘뜸밭’ 또는 ‘부전동’이라 불리었다. 지금도 내산리는 부전동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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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일 뜸밭골 내산 1리에서는 제1회 부전 매실꽃 축제가 열렸다. 자그마한 시골동네에서 축제가 웬 말인가 하겠지만 내산리의 매실 축제는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 낸 무공해 축제이다. 마을 주민들은 공주시에서 도로변 환경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심어진 매실나무를 적극 활용하여 소박한 마을 축제로 키워나간 것이다. 이날은 올해 들어 가장 매서운 황사가 있었던 날이었다. 먼 하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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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에는 허임의 12세손인 허은 씨가 살고 있다. 그는 갓 군대를 제대한 젊은 시절부터 동네 이장을 맡아 오면서 마을 안길 사업과 농지정리, 마을 확·포장 사업에 전력을 다해 묵묵히 일해 온 내산리의 숨은 일꾼이었다. 또한 부전대동계의 일원으로 궂은일을 도맡아 해오면서도 항상 조상에 대한 송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우직한 인물이다. 하양 허씨들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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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동의 명칭을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후기의 기록인 「부전대동계 문서」에서 부전동을 찾을 수 있다. 이 기록의 서문에 의하면 부전동에서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마을 계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부전이라는 이름도 조선초기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뜸밭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형국론과 관련된 이야기 외에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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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공부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다.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세운 것이다. 당시 마을 주변에는 초등학교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학교를 만든 까닭은 오랜 학문적 전통과 애향심의 발로였다. 내산리는 일제강점기에도 민경식 씨가 운영하던 사설서당이 있었다. 이 죽계서당에서는 우리말 쓰기에서부터 고전을 주로 가르쳤다.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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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전국 밤 생산량의 15%를 차지 할 정도로 산과 들에 밤나무가 가득하다. 정안면과 사곡면·이인면·우성면 일원에서 생산되고 있는 공주 밤은 토질과 기후 면에서 밤 재배에 적합하고 기술 수준이 높아 최고 품질의 밤으로 인정받고 있다. 내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9월이 오면 본격적인 밤 수확이 시작된다. 내산리의 마을 지형은 무성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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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제사가 끝나고 날이 샐 무렵 마을에서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싸리문 밖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손에는 시루떡이 놓여 있다. 이른 새벽 산새가 지저귀고 수탉이 목청을 뽐내는 시골 풍경과 그 속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종종걸음으로 이웃집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다. 무슨 일일까. 왜 사람들은 떡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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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는 자연 속에 동화되어 예술혼을 불태우는 조각가들이 살고 있다. 마땅한 작업장이 없어 고심하던 조각가들은 폐교를 작업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연락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 든 사람들은 동양화와 서양화에서부터 판화, 도자기 등 전공분야도 다양했다. 특히 석재조각은 기본적으로 무거운 장비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넓은 면적이 아니면 안 되었다. 폐교된 학교를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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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어느 마을에나 풍물의 전통이 남아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풍물을 운영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내산리의 풍물도 노인회를 중심으로 간간히 꾸려오고 있었다. 연로한 마을 어른들을 중심으로 풍물이 운영 되다보니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풍물의 전수는 물론이거니와 풍물계 자체의 운영이 곤란을 겪을 때가 많았다. 1997년 내산리 사람들은 풍물계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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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산리의 경우 다행히 다른 마을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었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북한군은 새벽을 틈타 조용히 마을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산리에는 마을사람들이 퇴각하는 북한군장교를 생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가슴 아픈 일화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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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농사일을 잠시 접어 두고 흐르는 땀을 식히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내산리 사람들은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이 마을회관과 정자에 모이곤 한다. 한 두 사람이 모여 농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넷이 되고 사물이 된다 싶으면 서로 악기를 잡고 장단을 맞추기가 일쑤였다. 고단한 농사일과 풍년을 기원하며 그렇게 한 시름을 놓는 것이다. 풍물을 신명나게 치면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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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일, 내산리 마을 사람들은 시린 손을 비벼가며 새벽부터 분주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연미산 정상에 올라 한바탕 풍물을 연주하기 위해서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행사를 해돋이 축제라 부르고 있다. 5시 30분경 연미산에 도착한 풍물회원들은 저마다 장구와 북을 짊어지고 둥근 해가 떠 주기를 희망하며 가파른 산을 올랐다. 게다가 빈약한 풍물회의 재정으로 간단한 먹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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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원리에는 주목할 만한 고려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원리 절터와 3층 석탑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유적이며, 이 지역의 지명에서도 고려시대의 역사적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동원리의 자연마을인 ‘원골’의 지명 유래는 첫째, 옛날에 ‘원님이 살던 마을’이란 뜻, 둘째 ‘역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원골 중앙에 위치한 석탑은 고려시대 이곳이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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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림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찍이 사림화에 앞장섰던 부전동민들은 근대 신학문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부전 대동계에서는 일제시기인 1920년대에 장자동학교라는 강습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약 3년간 유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때 신식교육 교사의 월급으로 산제답을 제외한 동답재산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부전동 주민들은 이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서 가장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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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밭골의 산신제는 4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대동계가 결성된 이래부터 지금까지 매년 정월 보름과 시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과연 현재의 산신제는 40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역사와 전통문화를 간직한 마을 내산리를 찾아 갔다. 흔히 산신제라 하면 산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옛 사람들은 산신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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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골 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해 주는 것은 현재 지표상에 남아있는 유적이다. 현재까지 원골에서 선사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유구천과 주변의 산세 등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므로, 원골 내지는 그 주변에 밝혀지지 않은 유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공주지역은 금강과 금강 유역의 깊고 넓은 하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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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초등교육박물관은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초등교육박물관답게 최초의 국어교과서에서부터 제7차 교육과정에 이르는 다양하고 희귀한 교과서들을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2001년 11월 1일 처음 문을 연 이래로 지금까지 매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는데 ‘사진으로 본 한국의 표정’(2001)이라든가 ‘방학숙제로 보는 초등교육 70년’,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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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교직생활을 마치고 내산리에 들어 온지도 벌써 20여년이 넘었다. 1985년 서산 운신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든 교정을 떠나 내산리에 들어오신 윤을용 할아버지. 농촌의 하루라는 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한 일상의 연속 같이 보이지만 여든이 넘은 노부부에게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른다. 하루도 변함없이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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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에 가장 화목한 집으로 소문난 임일순 가를 찾아 갔다. 우리 마을에서는 가장 손을 안댄 집일 거라는 마을사람들의 귀뜸이 있었다. 이 집은 1920년대 내산리 최고의 목수였던 박지우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9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래된 기와지붕에서 비가 새어 지붕만은 함석으로 깔아놓은 상태이다. 내부 구조는 방이 두개에 재래식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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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이 좋아 내산리에 이사 온 엄철용씨.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미군부대를 따라다녔다. 한창 학교 갈 나이였지만 ‘살기 위해’ 힘겨운 홀로서기를 감당해야 했다. 미군부대를 따라 다니며 구두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는가 하면 건축현장을 돌며 벽돌 쌓는 기술을 익혔다. 풍물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배고픈 아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힘닿는 데로 찾아 다녔다. 사람들이 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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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리에는 오래전부터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살고 있다. 이 강화최씨는 죽산에 거주하던 최순(崔淳)의 셋째 아들인 덕준(德峻)이 예안김씨의 사위가 되면서 전주이씨의 뒤를 부전동에 입향하였다. 그런데 이 최덕준의 고손자인 최우량은 허임에게서 침술을 배워 유명해졌다. 최우량[1599~1671]은 강화최씨 족보에 벼슬이 부사과(副司果, 종6품)에 이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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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은 힘겨운 농사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삶의 위안과 정감을 주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선소리꾼의 호흡에 맞춰 어려서부터 논메는 일을 해보았다는 몇몇 주민들은 막걸리와 풍물이 없으면 도저히 그만한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풍물은 산미증산계획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존속될 수 있었다. 임동순 씨의 증언에 의하면 두레가 시작되면 해당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