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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이 세운 초등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B03010006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대연

[우리 손으로우리 학교를]

내산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공부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다.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세운 것이다. 당시 마을 주변에는 초등학교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학교를 만든 까닭은 오랜 학문적 전통과 애향심의 발로였다. 내산리는 일제강점기에도 민경식 씨가 운영하던 사설서당이 있었다. 이 죽계서당에서는 우리말 쓰기에서부터 고전을 주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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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서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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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규칙 기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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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규칙 기록 문서

1961년 내산리에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학교를 만들자”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두서넛만 모이면 어김없이 ‘학교 건립’ 이야기가 화두였다. 그날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회당에 모여 앉았다. 공회당은 지금의 둥구나무가 있는 자리이다. 갑론을박의 토론은 한 달여를 질질 끌고 발전될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한 것은 우리 마을에도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열띤 토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학교를 세우겠느냐는 반대여론이 우세했지만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읍내 물을 먹어본 사람들은 가난한 농촌에서 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어린 아이들에게 등·하교의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자는 데는 모두가 찬성이었다. 하지만 예산과 인력이 문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를 건립할 땅이 필요했다. 여러 날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나무를 베어 책·걸상을 만들고 초가집을 헐어 학교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듬해인 1962년 4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초등학교는 귀산초등학교의 분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희소식이 퍼져갔다. 채수량이라는 분이 문중의 땅을 희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문중의 합의와 동의를 거치지 않아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향리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고귀한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채씨 어르신의 뜻이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채씨 어르신의 말씀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채수량은 채씨 문중의 종손으로 초가집에 살면서 평생 바지저고리만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분이 솔선하여 학교 부지를 희사하자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자신의 땅을 내놓기 시작했다.

학교부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학교가 세워지지는 않았다. 내산리에 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던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마을 주민들이 학교 건립에 자발적으로 앞장섰다는데 있다.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현대적인 기계장비를 활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집을 헐고 흙과 돌을 실어 나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산을 개간하는 일도 이루어졌다. 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람들에게 그 고마움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초가지붕을 벗고 신식학교로]

처음에는 초가집을 개조한 학교에는 1·2학년만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나 갈수록 학생 수가 늘어나자 관련 기관에서도 정식 초등학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자 학교는 초가집을 벗고 점차 신식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학생 수도 점점 늘어나서 1970년대 학생 수가 가장 많았을 때에는 19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2007년 현재 유치원 어린이까지 포함하여 138명에 불과한 귀산초등학교와 비교해도 월등히 많은 수였다고 하겠다. 학생들이 늘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학교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부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어린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위해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전 과정을 곁에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학교일이라면 모두가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운동회 날은 마을잔치가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마을사람들이 초등학교 운동회에 참석할 정도로 운동회는 모두가 기다렸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시골 초등학교에는 놀랄 일도 많았다. 각종 경시대회나 전국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실제로 한 여학생은 전국대회에서 ‘우리 아버지는 땜쟁이에요’라는 작품으로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청산초등학교 배구부는 공주 지역 초등학교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하는가 하면 충남 지역에서는 준우승을 하는 성과도 올렸다. 그 후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농촌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1995년 청산초등학교는 귀산초등학교에 편입되었다. 비록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청산’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추억의 항고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임홍순 씨는 내산에서 귀산초등학교까지 항고개를 넘어 걸어다녔다고 한다. 옆에 있던 다른 분들도 “그렇지”하며 고갯짓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사이를 가리키신다.

왕복 60여 분의 거리는 어린 아이들이 걷기에 너무 멀었다. 하지만 당시 내산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더 멀리서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추위가 예년보다 일찍 찾아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상에 시달렸다. 그 먼 거리를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고 걸었기 때문이다. 솜버선에 짚신을 신는다는 것은 부자들이나 할 수 있었다. 맨발에 나막신을 신으면 나막신을 고정하기 위한 줄이 발등에 얼어붙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거리에서 우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어느새 할아버지의 깊이 파인 눈가엔 정화수 같은 눈물이 고였다. 할아버지도 그랬었단다. 보리 한 말이 없어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한 노인은 지금도 ‘핵교’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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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고개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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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고개

[청산에 살어리랏다]

1960년대의 시골마을은 어땠을까. 어느 화가의 손길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겨운 풍경이었을까.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배고팠던 시절이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가엔 웃음이 가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세운 학교였기에 그 이름을 정하는데도 마을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내산리에 세워진 학교였기에 당연히 내산초등학교가 되었어야 하지만 학교명은 청산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학교이름이 청산초등학교로 지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여 내산면에 내산초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국에 동명이교가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임일순 씨와 허은 씨는 학교 건립에 지대한 공헌이 있는 사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창순, 임형수, 임동수, 임창용, 최재욱, 채수량 등의 인물이었다. 특히 임창순씨와 임형수씨의 공헌은 남달랐다. 임형수씨가 교육행정적인 노력을 기울인 반면 임창순씨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독려하여 실질적인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교 이름을 결정할 때 마을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청산’에 동의했다. 임창순 그의 호가 바로 ‘청산’이었다. 내산초등학교라 하지 않고 청산초등학교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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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2회 청산초등학교 졸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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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산초등학교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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