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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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山城址 |
영어의미역 | Seongsan Fortress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외성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산성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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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면적 | 성 안 603,200㎡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외성산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외성산에 있는 고대 산성지.
[변천]
성산성에 관한 문헌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울진군지』 울진읍 성곽 성산성조에 “현(縣)의 남쪽 성산동에 석축유지(石築遺址)가 있으나 지금은 사실을 알 수 없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의 정확한 존폐 여부와 운영 기간 등을 알 수 없다. 성이 위치한 구산리는 과거에 잠미동[잘미동]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성이 있었다고 하여 성산동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위치]
울진읍에서 남쪽으로 개설된 국도 7호선을 따라 수산교(守山橋)를 건너면 근남면에 이른다. 근남면과 매화면 경계의 구산교에서 서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구산리로 접어들면 넓게 펼쳐진 뱃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뱃들의 서쪽으로는 중등산으로 불리는 해발 118m인 구릉성 산지가 凹형으로 솟아 있다. 중등산의 동쪽 산기슭은 구산2리로 마을에서는 외성산동 혹은 바깥잘미로 부르고 있는데, 80여 가구가 모여 있다.
외성산동에서 중등산을 돌아 북서로 난 길로 가면 안늪들로 불리는 들판이 있다. 북쪽의 신봉산 기슭은 구산4리로 마을에서는 내성산동 혹은 안잘미로 부르는데,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 두 마을의 서쪽으로는 왕피천이 북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해발 437m의 남수산이 가로막고 있어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보인다. 즉, 동쪽으로는 남수산과 신봉산의 줄기가 서로 엇갈리게 마을의 입구를 지키고 있고, 북쪽의 신봉산, 남쪽의 남수산, 서쪽의 왕피천이 이 마을을 보호하는 지세이다.
[형태]
성산성은 문헌의 기록이나 마을 주민의 탐문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성이다. 다만, 외성산동과 내성산동이라는 마을명으로 보아 외성과 내성을 가진 성지로 판단된다. 내성산을 감싸 안고 있는 신봉산과 외성산을 휘감고 있는 중등산을 답사하면 성터의 흔적을 일부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안늪들을 가로질러 중등산을 타고 올라가 중등산의 정상부에서 능선의 척추부를 따라 동진하면, 일부 구간에서 토축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성의 형태는 극히 미흡하여 축조 방법이나 축조 시기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400m 떨어진 지점으로는 능선이 서서히 낮아지는 지형을 하고 있고, 구산4리와 구산3리를 연결하는 소로[일명 뒤들고개] 개설로 인해 성의 연장선이 일단 단절된다. 고개를 지나 다시 동진하면 능선은 차츰 오르막길을 형성하고 있다.
동쪽의 봉우리는 해발 75.5m가 정상이며, 정상을 지나 능선은 북동으로 긴 자루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산정은 다소 평평한 지형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내성산동을 반원형으로 감싸 안고 있는 아늑한 형상으로 성산성의 외성에 해당된다.
성산성의 내성은 두문내들 서쪽의 돌출된 능선 척추부를 따라 그 연장선을 찾을 수 있다. 내성의 성벽 역시 잔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여 축조 방법 등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의 잔흔 일부와 성벽의 연장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한 무성(無城) 구간 등이 전부라고 할 만큼 매우 빈약하다.
[현황]
성의 잔존 상태가 극히 미흡하여 축조 상태·구조·시기 등을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지형으로 살펴보면 외성의 총 길이는 약 1,130m이며, 내성의 총 길이는 약 1,470m에 이른다. 외성의 각 끝지점을 경계로 한 성 안 마을의 형국은 두문내들과 안늪들이라는 넓은 들이 있고, 하나의 실개천이 흐르며, 내성산동에 속하는 취락이 모여 있는 형상이다. 성 안의 총 면적은 약 603,200㎡이다. 성산성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풍부한 수량의 강물이 흐르며, 넓고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어 성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생활하기 편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산성 일대와 성 안에서 와편류는 채집되지 않았으며, 삼국시대 토기편 소수와 생활 자기편 일부가 지표에서 확인될 뿐이다. 삼국시대 토기편은 회청색 경질로 태토도 치밀하지 못하고 소성 상태도 불량하다. 기형을 알 수 있는 편들은 없고, 일반 호편의 신부에 해당하는 부분들이어서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이른 시기부터 이 일대에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편도 극히 소수만 채집되고 있어 기형을 통한 시기적 특징을 알 수 없다. 다만, 자기의 태토는 매우 치밀하고, 유약의 발색 및 착색 상태가 양호하며, 굽바닥으로 규석 받침 흔적이 있어 중상품의 자기들로 판단된다.
한편, 외성산동 동남쪽의 뱃들 들판 한가운데에는 삼층 석탑과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삼층 석탑은 오래 전에 유실되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 당간지주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일대에는 배잠사라는 상당 규모의 사찰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당간지주 외에는 기타의 주초석이나 유구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당간지주는 73㎝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북쪽의 것은 현고 173㎝, 폭 30㎝로 상부 일부가 훼손되어 있다. 남쪽의 것은 현고 185㎝, 폭은 32㎝이다. 당간지주의 상부에는 폭 10㎝의 방형 지주걸이대가 파여 있다. 그 밖에 중등산 일대에서는 장군의 투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큰 못[성산지] 옆에는 토기를 구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데, 지금도 밭을 경작할 때 자주 토기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성산성은 외성과 내성을 가진 이중성으로 볼 수 있고, 외성은 중등산을 이용하여 반원형으로 성안마을을 감싸 안고 있으며, 내성은 신봉산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북쪽에서 넓게 성안마을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외부에서는 성 안을 쉽게 범접할 수 없고, 성 안의 상황이 전혀 노출되지 않는 군사적인 요새로 매우 적합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