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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의 눈에는 상대원의 변화가 늘 안타깝다. 상대원이 자꾸 죽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뒷걸음질하는 상대원을 다시 활기찬 동네로 만드는 방법들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상대원3동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기도 했다. 우선 상대원에도 지하철이 필요해. 상대원을 지나는 버스가 아무리 늘어도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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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지금도 상대원3동에 살고 있다. 1959년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대원을 떠나본 적이 없는 터줏대감이다. 상대원 곳곳에 50년의 삶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궁씨는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이다. 상대원시장 입구의 한 5층 건물에 궁씨의 사진 작업실이 있다. 좀 낡은 계단을 올라 들어가게 되는 작업실에는 촬영도구들과 함께 그가 찍은 사진들이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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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검단산 남서쪽의 지대가 높고 기복이 심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보통골, 사기막골 등 몇 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씨는 그것들이 합해져 상대원리가 되고 다시 상대원동이 되는 역사를 다 지나왔다. 예전에 비하면 인구도 많아졌고 살기도 좋아졌다. “옛날엔 상대원 1리 2리 이런 식으로, 상대원 1, 2, 3동까지 지금 현잰 바뀌어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인구도 거의 8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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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중학생이었을 때 상대원공단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상대원 거리는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 했어요 그냥 뭐 봇 진짜 그야말로 뭐 봇물이라고 그러나 막 밀고 들어가는 그러고 다녔어요 샤니케잌 뭐 또 콘티빵 뭐 이런 때는 진짜 인구 많았었고. 또 상대원에 방이 웬만하면 방이 조금만 꾸며서 놔도 다 세가 나가고, 어릴 때 우리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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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3학년까지 성남초등학교를 다녔다. 성남 상대원을 비롯해서, 단대리, 수진리, 탄리, 그리고 모란에서도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개 넘고 물을 건너는 험한 길이었다. 황서고개와 박석고개를 넘어야 하는 학교길은 겨울엔 너무 추웠고, 날씨 좋은 날엔 가끔씩 출몰하는 문둥이 때문에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문둥이는 가끔씩 고갯길 이곳저곳에 나타나 등교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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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잘 사는 동네였고 은행동은 못사는 동네였다. 상대원공단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69년도 70년도에 철거민들이 들어와 천막촌을 형성할 때만 해도 상대원동이 이렇게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처음 철거민이 들어왔을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아니 오히려 어린 궁씨에게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처음에 철거민들 들어와 갖고 군용텐트 촥 쳐갖고 거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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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는 궁씨는 요즘 들어 상대원이 다시 되살아나 옛날의 활기를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원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 궁씨의 주장이다. “오히려 전철이라든가 이런 연계적인 거, 좀 더 상대원 쪽으로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는냐 하는 생각도 들고. 8호선 같은 경우에도 아까 말씀드린대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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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에는 황촌말, 송촌말, 대원, 보통골, 사기막골 등 옛날 마을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토박이 궁씨는 옛날 마을들을 마음 속에 쉽게 그릴 수 있다. 황촌말은 요기 앞동네고, 대원은 상대원1동 사무소 뒤쪽으로 원주민촌이 있었다. 사기막골 같은 데는 상대원에서도 문화적 값어치가 나가는 동네이다. 궁씨는 간혹 성남의 문화유적을 촬영하러 나선다. 작년 여름에는 사기막골을 카메라에 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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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상대원의 변화를 다른 부분에서도 느낀다. 상대원은 더 이상 폐쇄된 지역사회가 아니다. 상대원은 이미 세계를 향해 열린 사회이다. 상대원에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 다문화가정이 그것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정책적으로 동사무소 같은 데서 외국인 대상의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궁씨와 같은 사진작가 중에는,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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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부터였다. 흑백사진에 매료되어서 78년도부터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새나라백화점 7층에 있던 서울사진학원에서 배웠고, 우연치 않게 군 사진병 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사진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성남에서 을지로5가까지 다니는 570번 버스 있었죠. 상대원에서는 저쪽에서는 66번 있었고. 그 버스들 완전히 콩나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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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3년간 사진병 복무를 마치고 성남으로 돌아왔을 때, 성남에는 비디오 붐이 일었다. 결혼식, 회갑잔치 때 한 30~40분 찍어 편집해 주면 15원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금새 경쟁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가격은 7~8만원 대로 떨어졌다. 그 후로 얼마동안 궁씨는 주중에는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형님 가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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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결혼 전에 아내와 약속한 게 하나 있었다. 40대 넘으면 잘 살든 못 살든 사진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마흔 다섯이 되던 2004년에 궁씨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정식으로 사진을 배우러 대학 1학년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내처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다. 내년이면 졸업 논문을 내야 한다. 고맙게도 궁씨의 아내는 이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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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업을 하면서 궁씨는 상대원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철거민들이 이주해 와서 천막치고 살던 69년, 70년부터 상대원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처음 상대원동은 찌들은 인생들의 집합소였다. 삶은 어렵고 구차했었다. “옛날에 지금 공단이 2공단 3공단으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3공단 쪽이 늦게 생겨가지고 그 당시에 철거민들이 땅을 준 걸 팔고, 제가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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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씨는 아내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아내는 1남 1녀의 아들 딸을 잘 키웠다. 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은 대학을 준비 중이다. 그 아이들은 궁씨의 고향인 상대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고향도 상대원이다. “우리 아들 딸은 빨리 가자 왜 여기 살고 있냐 난 이유를 모르겠다 라는 쪽이에요 특히 아들네미가 그런 주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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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성남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성남제일, 대원을 거쳐 중원초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짧게는 6개월만에도 학교를 옮겼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이사를 많이 다녀서가 아니었다. 집은 늘 상대원에 있었다. “우리 사는 데는 상대원동이 한정돼 있는데, 인구가 늘어나니까 성남초등학교에서 성남제일로, 인제 다시 인구가 늘어나니까 대원초등학교를 지어서 대원초등학교로 왔다가, 또 인구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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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사람들은 남한산성에 자주 오른다. 궁씨도 황송공원 쪽을 통해 자주 오른다. 황송공원에는 게이트볼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이니까 등산도 하고 게이트볼도 치지만, 궁씨가 젊었을 당시에는 데이트 장소도 시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젊었을 때 데이트 같은 건 종합시장이 제일 좋은 장소였죠. 종합시장 다음에 상대원시장 쪽이었죠. 상대원시장 쪽도 그 당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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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상대원공단과 지역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궁씨는 상대원시장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공단의 인력을 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주민 자치센터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보다 분명하고 확고해졌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런 생각을 말해 왔다. 오늘도 궁씨는 혹시 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나 걱정이다. “아 내가 한 마디 덜한 게 하나 있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