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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는 1963년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시 성남이라는 도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태어났다고 했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출생되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2남 2녀를 출생시키고 구보의 동생이 갓 돌을 지날 무렵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아무 재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네 명의 자식을 떠맡은 어머니의 서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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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의 집은 답십리 개천 주변에 있었다. 이삽십 평 남은 되는 집이었다. 끼니도 어려운 사정이었으니 집의 형편이야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더없는 의지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람은 밖에서 불어왔다. 소년 구보가 초등학교 2학년 될 때쯤 서울은 재개발 바람이 불었고, 소년 구보가 살던 답십리 개천 일대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구보의 나이 아홉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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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의 어머니는 혼자 몸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일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 짓는 공사장의 잡부가 되었다. 다행히 집짓는 일거리가 끊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을 조금씩 떼어 벽돌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저 아래쪽 개천의 모래를 퍼다 날랐다. 어머니도 형도 누나도 그리고 소년도 틈만 나면 개천의 모래를 세숫대야로 퍼다 날랐다. 그리고 시멘트를 사다가 조그만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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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의 형은 집안의 장남이었고 기둥이었다. 형은 똑똑한 편이었고 공부도 좀 잘 했다. 형은 비인가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다시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그래야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소년 구보는 포기해도 형만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랬다. 구보도 거기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형이 좀 더 나은 집안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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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소년 구보의 집 주변에는 여전히 집이 몇 채 없었다. 대신 갈대처럼 우거진, 1미터 이상 되는 풀들이 사방팔방에 자라고 있었다. 풀밭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우거진 풀들도 장마철이 되면 빗물에 다 씻겨 내렸다. 상대원3동은 산을 깎아 잡은 터였다. 그래서 장마철이면 늘상 일이 터졌다. “상대원3동 모든 일대에 산을 다 깎아놓았기 때문에, 장마가 한번 지면은 1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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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는 스무살 청년이 되었다. 그 무렵 구보는 건축 공사장 야방 일을 시작했다. 야방은 공사장의 밤 경비 일이었다. 물론 낮에는 잡일이나 허드렛일도 거들어 주어야 했다. 그렇게 집짓는 현장을 한 곳 두 곳, 한 동 두 동 쫓아다니며 건축 일을 배웠다. 눈썰미가 좋은 구보는 그런대로 건축 일을 익혀갔다. 그때쯤 구보의 어머니는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구보는 몇 년간 건축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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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상대원1동 쪽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공장에서는 서울서 온 철거민들이 일을 했다. 젊은 사람들부터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상대원 공장으로 일을 다녔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총각 처녀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인근의 상대원시장은 삶의 거점과 같은 곳이었다. 쉬는 날이 오면 상대원시장통에는 총각 처녀들로 넘쳐났다. “일요일 날 보면은 그 젊은 청년들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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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분양받은 상대원 집터 주변은 그 후 5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산을 깎아 급하게 만든 그곳에 생계를 이어갈 방편이나 일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원 지역은 집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집들이 지어졌다. “5년 이상 지나고 하니까 집들이 점점 생기기 시작하드만 71년 지나 5년 지나니까 어느 정도 들어서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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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14살부터 일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출퇴근 하거나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혹은 혼자서 자취 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장 생활을 시작한 것은 전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단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따라 찾아갔었다. 구보는 그곳에서 완성된 전구에 불이 켜지는지 검사했다. 1년 정도 했고 곧 옮겼다.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글러브에 솜뭉치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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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팍팍했다. 부모들은 삶에 쫓겨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 없이 커 나갔다. 어떤 아이는 어려서부터 술과 담배를 배웠고 또 어떤 아이는 약간 방탕끼를 갖고 제멋대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객지로 떠도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도 한때 한동안 그런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도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었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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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가 아내를 만난 건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후였다. 나이가 서른 즈음이 된 신앙심 깊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아주머니들은 언제나 신앙심 좋은 아가씨를 물망에 올려놓고, 청년과의 결혼 생활을 요모조모 그려보고 예상해 보았다. 구보의 집에 세들어 살던 젊은 아주머니도 그랬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이만 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서,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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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다방은 한 20평이나 25평 정도 되는 다방이었다. 테이블은 15개 정도 놓여 있었고, 그처럼 선보러 나온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던 곳이었다. 같은 교회 다니던 권사님 한분도 원다방에서 선을 봐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0년 초만 해도 사람들은 만남의 장소로 다방을 주로 이용했었다. “당시에는 만날 장소가 성남 쪽에서는 특별한 장소가 없으니까 원다방이라든가 돌고래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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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다방에서 맞선 봤던 여자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구보는 청혼을 했다. 둘 다 혼기가 찬 상태였고, 서로 바쁘게 사니까 시간 끌 일 없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자 쪽에서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고 빨리 확답을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혼을 받은 여자도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러자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는 서울 대치동에서 살았고,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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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워낙 가난한데다 직장생활하면서 벌었던 돈도 족족 탕진해 버린 터라 모아논 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 집 2층에 신혼집을 차리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산 것은 1년 남짓. 1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400만 원을 내놓으시며 독립하도록 했다. 구보는 상대원2동에다 보증금 400만 원에 월 10만 원 하는 셋집을 얻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짜리 집이었다. 지하방은 늘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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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의 가장이 된 구보는 구두 공장에 다니면서 구두일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랬다. 직접 구두 수선하는 일을 배워 보라고, 공장 다니는 것보다 보수가 훨씬 낫다고. 그도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생각했다. 한 달 두 달 일 년, 그 이상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었다. 구두 세탁과 수선을 함께 하는 사람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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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발 구두세탁소는 잘 되었다. IMF 경기 한파의 덕을 본 것이 운이 따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신속 수거 배달이 사람들에게 먹혔던 것이다. 가파른 언덕배기 많은 상대원 인근에서 오토바이는 영업에 없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구보는 그게 늘 불안했다. 언덕배기에서 자칫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때때로 머리를 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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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노력, 삶에 대한 정성, 거기에 적당한 행운이 따르면서 구보의 삶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결혼 이후 7년 동안 생기지 않던 아이도 태어났다. 첫 딸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몸이 좀 약했어요. 그래서 하나만 날라 그랬는데, 또 내가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도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 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는 너무 외롭다 둘 낳아야 된다 자꼬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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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삶에서 어머니는 조용하면서도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가 이렇게 안정된 삶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어머니는 삶의 형편을 요리조리 재는 민첩함보다는 그냥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살아오셨다. 그의 아내도 여지껏 처음 분양받은 땅에 그대로 살고계신 어머니의 삶이 참 인상적이라며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처음 어머니(가 성남에) 들어왔을 때 땅이 막 이렇게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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