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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매의 장남이라서 눈치가 빤했다. 그래서 염씨는 열 여섯 무렵에 고향 포천을 떠나야 했다. 조그만 시골 농사로는 얼마 안 되는 중학교 학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다. “제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 뒀어요. 나 하나만 학교를 안다니면 그 밑에 동생들은 줄줄이 있고 나 혼자만 학교를 안다니면 부모님이 그렇게 고생을 안하실텐데. 그래서 안 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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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성수시장에 가게를 열고, 순박한 시골 아가씨와 중매로 결혼도 했다. 하지만 장사는 하면 할수록 힘들었다. 가진 자본이 얼마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성격이 너무 고지식한 탓도 컸다. 장사를 하다 보면 물건을 외상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염씨는 도무지 그걸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진 돈이 없으면 필요한 물건도 제때 확보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전을 하던 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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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의 첫 가게는 겨우 5,6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크기였다. 그래도 시장 내에 자리가 난 가게는 거기 밖에 없었다. 가게를 상대원으로 옮기긴 했지만 장사 밑천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연 가게라 단골 손님도 없었다. 가게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염씨는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그 때 여기 처음 이사와 가지고 김장을 50포긴가 했을 거예요.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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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위쪽일수록 장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염씨는 얼마 가지 않아 알아차렸다. 그러던 차에, 8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근처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서 가게 자리가 하나 났다. 염씨는 서둘러 계약을 했다. 처음 가게에서 네 가게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얻은 가게는 염씨의 아내가 맡아보았다. “저는 밑에서 보고 제 집사람은 위에 쪼그만 가게 거기서 보고. 그렇게 장사를 하다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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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가 해결되어 집안이 안정되자, 장사도 차츰 나아졌다. 이후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렇게 다시 3년여가 흐르면서 돈도 좀 모아졌다. 그즈음 해서 위쪽 가게 바로 옆에 빈 가게 자리가 하나 났다. 그래서 염씨는 아래쪽에 있던 첫 가게를 정리하고 그리로 옮겼다. 아내가 맡은 가게와 자신이 맡아보는 가게가 이제 나란히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0년 이상을 염씨는 같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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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에는 가게 앞마다 노점도 많았다. 노점을 하는 사람이나 상가를 운영하는 사람 모두가 상대원시장이라는 공동체 내에 있었다. 그들은 친목회도 같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씨는 친목회 회원에게서 동업 제안을 받았다. 헌집을 매입하여 새집으로 지어 파는 일이었는데, 집을 많이 지어본 사람의 제안이라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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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90년 분당 신도시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장사에서도 이문이 많이 남았고, 거기다 집짓기 동업에서도 이윤이 있었던 터라, 그는 돈의 여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집짓기 동업자의 추천대로, 성남 시민이면 누구나 분양 신청이 가능한 시범단지를 노렸다. 하지만 경쟁률이 워낙 심했다. “그 다음서부터는 주택 청약예금인가 뭐를 얼마를 넣으면 하는 게 있었어요. 처음에는 삼십 몇 평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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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네 가족이 아파트에서 좀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염씨의 가게가 있는 상대원시장은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분당 신도시로 인해 상대원시장은 차음 활력을 잃어갔다. 상대원시장의 손님들이 신도시에 들어선 백화점과 현대식 마트들로 발길을 돌렸다. 특히 분당의 백화점들이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상대원시장에 치명적이었다. 상대원의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쇼핑 기회를 제공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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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1996년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장사가 유지되었다. 문제는 97년 IMF였다. IMF 1년 전부터 장사는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다. IMF가 뭔지 시장 사람들은 잘 몰랐다. 가게를 닫고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겨우 현상 유지를 하면서 IMF 터널을 벗어나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염씨는 후자에 속했다. 장사는 가게 세내고 먹는 거 충당하고 나면 끝이었다. 그래도 그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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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어떻게 지났는지, 시장 사람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대원시장은 다시 한 번 큰 변화에 내맡겨졌다. 상대원시장 한 가운데 대형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그 안에 마트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재래시장 자체가 사라질 운명을 맞게 되었다. 많은 상가들과 노점들이 사라지고, 남은 상인들도 장사에서 이윤을 남기기는커녕 가진 돈을 더 밀어 넣어야 될 형편이었다. 염씨는 앞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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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분당 아파트에 입주한 지 10년 만에 팔아버렸다. 한국에서 월드컵 열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2002년이었다. 48평 아파트를 3억 5천에 달랑 팔아치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싸도 너무 싼 가격이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아파트가 최고점을 찍고 1년 만에 반토막에 가까워진 지금 시세보다도 싼 가격이었다. 그리고 염씨네는 다시 상대원동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살던 장모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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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동백지구 상업용지 매입하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돈이 모자랐다. 은행동에서 그릇가게를 하는 여동생과 공동 투자 형식을 택했다. 남하고 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피붙이가 나을 듯 싶었다. 공개 입찰에 몰려든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염씨는 남들보다 좀 높은 가격으로 입찰에 응했다. 토지공사에 하는 거니까 정확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고, 또 토지공사 보증으로 60%까지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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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요즘 들어서 세상살이가 더 걱정스럽다. 의학 발달로 수명은 길어져 가는데 늙어서 뭘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동백지구에서 장사를 하든 임대료를 받든 어떤 식으로든지 노후대책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나이 먹어 아파트 경비하고 파지나 고철 줍는 노인들이 그냥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진짜 열심히 살았고 진짜 아끼며 살았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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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재래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좀 비싼 가격이라도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깔끔한 매장을 선호한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쇼핑도 여기에 가세했다. 염씨의 딸도 한 달에 몇 번씩은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고 있다. 이래저래 상대원시장은 긴 침체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염씨가 운영하는 그릇가게도 월매출이 계속 줄더니, 요즘 들어서는 임대료 내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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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장사가 잘 될 때는 바빠서 못 다녔다. 장사하고, 돈 버는 일 외는 별다른 취미도 여가생활도 없었다. 친목회 일 이외에는, 시장 밖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85년도에 상가 사람들이 모여 한우리라는 친목회를 만들었다. 꽃집 사장님도, 고춧집 사장님도, 옆에 앞에, 앞에 옆에 다 해서 열 몇 사람이었다. 고향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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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가 상대원으로 왔던 80년대 초는 장사가 참 잘 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상대원공단은 활발하게 돌아갔고, 근로자들이 시장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젊은이들은 간이부엌이 딸린 방 하나 짜리에 주로 살았다. 방안에는 비키니 옷장 하나에 조그마한 호마이카상이 놓여 있었고, 부엌에는 석유 곤로와 밥공기와 국그릇 정도가 갖추어졌다. 또한 돌이나 백일이 되면 뷔페를 찾는 지금과는 달리,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