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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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學生抗日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929년 광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학생 독립 운동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 출신 학생들이 참가했던 사건.
[개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한 지 10년째인 1929년 광주 지역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시위는 이듬해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0년대 학생들의 독서회 활동과 동맹 휴업을 통해 축적된 역량에 기반하여 촉발된 것이었다. 이 운동에 화순 지역의 학생들도 다수 참여했고 사건 직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광주는 광주 고등 보통 학교·광주 농업 학교·전남 도립 사범 학교·광주 여자 고등 보통 학교 등 여러 조선인 학교와 광주 중학교 등 일본인 학교가 밀집한 교육 도시였다. 당시 화순 지역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는 중등 학교가 없어 주로 광주의 중등 학교에 진학했고, 학생들은 식민 지배에 강한 저항 의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1920년대 이념적 사조인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광주의 청년 운동가들은 독립의 이념적 기반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사회주의 영향은 교내 독서회를 통해 전파되고 있었다. 1929년 11월 이전까지 광주 지역 소재의 조선인 학교들에는 이런 독서회가 조직된 상태였고 상층에는 학교별 독서회를 묶어주는 독서회 중앙 본부가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조직적 활동 외에도 일반 학생들은 평소 민족 차별적 교육에 항의해 1920년대 중반부터 자주 동맹 휴업을 일으키며 항일 의식을 공유하고 조직적인 저항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경과]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 지역을 오가며 통학하던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나주역 사건 후에 조선인 학생에게만 차별적인 처리가 이루어지자 학생들의 분노는 한껏 고조됐다. 결국 이런 분노는 1929년 11월 초에 대규모 시위로 폭발했다.
11월 3일은 일제의 4대 명절인 메이지절[明治節]이 열리던 일요일이었다. 학생 중 일부는 광주 지역 신사의 참배에 동원되었고 시내에는 인파가 많았다. 때마침 광주 지역에서는 전라남도청 주관으로 전라남도 지역 누에고치 600만 석 달성을 자축하는 기념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신사 참배를 마치고 나온 조선인 학생들은 나주역 사건을 왜곡 보도한 일본 신문 광주 일보사에 들어가 항의 시위를 했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 제작을 방해했다. 이 사건은 화순 지역 출신의 민영흥 등이 주도했다.
같은 날 광주 시내 전역에서 시위와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이 동시에 전개됐다. 특히 광주역에서는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는 평소 광주 고등 보통 학교 등에서 독서회 활동을 해온 화순 지역 출신의 주당석이 적극 주도한 것이었다. 일제는 경찰과 소방대를 풀어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시위는 11월 12일에도 재개됐고 화순 지역 출신의 박형기 등이 적극 참여했다.
[결과]
광주 학생 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듬해 초까지 전국에서는 190여 학교에서 5만 4000명 정도가 항일 시위에 참가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시위 주동자와 함께 이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독서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화순 지역 출신 학생으로는 민영흥·주당석·홍귀주·이덕우·조계현 등이 체포되어 실형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이었다. 독서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광주에서는 독서회 활동이 명맥을 유지해 1941년에 이른바 무등회 사건으로 이어졌다. 한편 학생 운동 당시 실형을 받은 화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은 출옥 후에도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도립 사범 학교 독서회 활동을 하고 11월 3일의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된 이덕우의 경우, 출옥 후 변호사가 되어 독립 운동가들의 변론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