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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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화순군의 등장]
전라남도 화순군은 조선 시대에 능주목·동복현·화순현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786㎢의 지역이 능주목·동복현·화순현 세 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화순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능주목의 면적은 화순 지역 전체의 약 45%, 동복현은 35%가량, 화순현은 20%가량을 차지했다.
1895년에는 기존의 행정 단위가 각각 능주군·동복군·화순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8년에 화순군과 능주군을 통합해 능주군이라 칭했는데 이로써 화순 지역에는 한동안 능주군과 동복군이 양립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능주군과 동복군이 통합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생겨난 행정 구역을 화순군으로 불렀다.
[사회적 통합의 지연]
오랜 기간 독립된 고을로 지내온 역사와 험준한 산세로 인한 내부 교통의 불편 등은 지역 통합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화순군에서 3·1 운동이 상대적으로 분산적이고 소규모로 전개된 것은 더딘 사회적 통합에서 일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1920년~1930년대 화순 지역의 청년 운동·농민 운동·노동 운동조차 화순·능주·동복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분산적으로 진행된 경향이 강했다. 세 지역으로 분산된 사회 운동을 통합하려는 노력들이 농민 운동의 연대, 1928년 화순 청년 동맹의 조직 등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928년 신간회 화순 지회의 설립이 실패한 것처럼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식민 지배에 맞서 투쟁했다는 공통된 경험이 축적되면서 점차 화순군을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척박한 농업 상황과 농민 운동]
지역 통합이 더딘 것에 비해 일제 강점기 화순군의 경제 상황, 특히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경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0~1930년대에 화순군은 2만여 호 가운데 1만 7000여 호가 농가였다. 그 가운데 지주와 자작농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자작 겸 소작농은 30%, 순수한 소작농은 60%였다. 소작에 의존했던 농가가 전체 농가의 90%인 1만 5000호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순수 소작농의 비중이 유달리 높았는데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 순수 소작농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심한 편이었다.
소작농의 높은 비중은 산악 지형이 우세하여 농경지가 협소한 데 따른 결과였지만 척박한 소작 관계가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화순 지역의 소작농들은 높은 소작료를 지불해야 했고 갑작스럽게 소작권을 빼앗기는 일로 지주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소작농의 삶은 더욱 절박해졌다. 1920년대에 1만여 호의 소작농 가운데 2,000호 정도는 궁농(窮農), 즉 보릿고개에 비축된 식량이 전혀 없는 빈농들이었다. 때문에 화순 지역의 농민들은 높은 이자로 곡식이나 현금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3~4월 춘궁기에 빌려 9~10월 추수기에 40%의 이자를 물고 갚아야 하는 ‘색거리’란 관행이 성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농민들의 열악한 상황은 1920년~193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빈번한 소작 쟁의의 발생과 활발한 농민 운동 단체의 결성의 촉매제가 되었다. 1920년대에 능주 지역에서만 능주 노농 청년회, 능주 노농회, 능주 무산 청년당, 능주 농민회, 신흥 농민 조합, 춘양 농민 조합 등이 시기를 달리하며 활동했다.
[화순 탄광과 지역 사회에서의 비중]
일제 강점기에 화순 지역에는 특별한 공업 시설이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석탄 생산이 주목받았다. 전라남도에서는 드물게 고생대 지층이 분포하는 화순 지역에는 부분적으로 함탄층이 산재하였다. 특히 화순군 동면은 193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채탄을 시작하였다. 박현경의 화순 무연탄 회사가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석탄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1942년 화순역과 복암역 사이 12㎞ 구간의 철도가 가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순 탄광이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채굴 초기에 일시적으로 고용이 늘어났고 1939년 가뭄 때처럼 간혹 일거리를 찾아 농민들이 탄광에 몰려드는 일이 있었지만 한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다. 광부들의 조직화도 더뎌 화순 지역에서 탄광을 중심으로 한 노동 운동은 해방 후인 미군정 시절에 본격화되었다.
화순군 이양면과 한천면 일대의 호남 탄좌는 1930년대 이미 존재가 알려졌으나 채굴을 1960년대에 본격화됨에 따라 이 역시 일제 강점기 화순군의 노동 운동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교통망과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화순 지역에서 교통망과 관련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30년 화순군을 경유하는 광주~여수 간 광려선 철도의 개통이었다. 광려선 철도는 화순군의 서부 지역인 지석천 수계를 따라 가설되었다. 그러나 광려선 철도가 화순 지역의 내부 교통과 사회적 결합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철도는 화순군 동부 지역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이를 보완해 줄 120㎞의 도로 역시 험준한 산악으로 인해 지리적 분절성을 완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 지역의 사회 생활뿐 아니라 민족 운동은 여전히 화순·능주·동복 지역의 세 지역으로 삼분되어 이루어졌다.
광려선 철도는 역설적으로 광주 지역과 인접한 화순군 군소재지인 화순면의 지리적 편심성(偏心性)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시기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민족 운동이 광주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일부 민족 운동의 역량이 광주 지역으로 흡수되는 현상을 보여준 것은 이런 교통망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