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3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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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송장배미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247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전구간 | 용못(송장배미)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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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못 |
[정의]
개항기 우금치 전투에서 사망한 동학농민군의 시체를 처리하였다고 알려진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못.
[개설]
공주시 교동에 있는 하고개를 넘어서면 무령로와 왕릉로가 만나는 모서리에서 ‘송장배미’로도 불리는 ‘용못’을 만날 수 있다. 1894년(고종 6) 가을 동학 농민군 최후의 전투였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밀린 농민군이 무수히 죽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동학군은 충청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 밑에 있는 웅진동에 집결하였으나 마치 병의 목과 같은 이 지역을 통과하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동학군의 주검은 계곡을 가득 메웠으며, 피는 곰내를 적시고 금강까지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봉황산 뒤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군의 주검은 한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군들의 시체를 전부 다 처리할 수 없어서 이 연못에 시체를 넣었다는 장소인 만큼 민초들의 한을 담은 조형물에서도 서글픔이 묻어나는 듯하다.
[명칭 유래]
강물은 말라도 용못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이다. 이 논을 경작했던 이상집에 따르면 “어른들 말씀에 농민군 18명이 이 논에서 죽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지금은 작고한 이상필과 그 가족이 1973년 우금치 고개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진 뒤인 1979년까지 송장배미에서 ‘무언(無言)의 고사(告祀)를 지냈다’고도 전하였다. 관군들의 기록에는 “11월 9일, 송장배미 근처 박산소에서 이른 아침부터 공주로 넘어 오려는 농민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군 백낙완(白樂浣)의 『남정록(南征錄)』에는 “박산소 부근의 전투는 매우 팽팽하여 육박전까지 벌어졌으며 이 싸움에서 수십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송장배미에서만도 십 수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공주 우금치 전적(公州牛禁峙戰蹟)[사적]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동학군이 공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쓰러져 간 한을 풀어 주려 한 듯하다. 우금치 고개 언저리에서 동학군의 유골이 출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금치가 공주성의 인후에 해당한다면 곰나루에서 웅진동을 거쳐 일락산과 이어져 있는 봉황산을 넘는 길목은 목덜미에 해당하는 급소였다고 후세의 사가들은 전략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