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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95
한자 牛禁峙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Ugeumchi
이칭/별칭 우금재 전투,우금티 전투,우금고개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주미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홍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공주 우금치
관련인물/단체 전봉준(全琫準)[1855~1895]|손병희(孫秉熙)[1861~1922]|홍계훈(洪啓薰)[?~1895]|김학진(金鶴鎭)[1838~1917]|최시형(崔時亨)[1827~1898]|동학

[정의]

1894년(고종 31)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개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성립하였으며, 6월 23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내각과 함께 동학농민군 토벌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전봉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을 비롯한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농민 주력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9월 10일 삼례에서 ‘척왜(斥倭)’를 내세운 재봉기를 선언하였으며, 무력 봉기에 미온적이었던 동학교단의 최시형 또한 9월 18일 각 지역에 기포령을 내려 재봉기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기포령은 동학교단이 모든 교도들에게 무장 봉기를 지시한 것으로서, 이에 따라 전국의 동학 조직은 즉각 봉기에 나섰다. 우선 전봉준의 지휘하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공주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손병희의 북접군과 합류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목적]

당시 공주는 충청감영이 위치한 곳으로, 서울을 진격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고 향후 동학농민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우금치는 전라도 지역에서 부여, 논산을 거쳐 공주감영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서,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을 선점하여 기선을 장악해야만 했다.

[발단]

삼례에서 재봉기를 결의한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4천 여 명의 주력군을 이끌고 북상한 전봉준 휘하 동학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 이후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이 합류하고,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이 가세하면서 그 수가 4만을 넘어섰다.

10월 23일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북상한 동학농민군은 이인역 근처에서 관군 및 일본군 연합부대와 한차례의 접전을 벌였으며, 그날 밤 효포에서 다음날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은 효포에서 공주로 넘어오는 능치를 향해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화력과 관군의 협공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고 논산으로 후퇴를 하였다. 논산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동학농민군은 11월 8일 공격을 재개하여 판치의 구상조 부대와 이인의 성하영 부대를 물리쳤다. 8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11월 9일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경과]

관군과 일본군은 우금치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의 총공격을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우선 우금치에서 가장 높은 견준봉에는 경리청대관 백낙완이 이끄는 부대가, 그 맞은편 봉오리에는 모리오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고개 바로 밑에는 성하영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감영의 외곽인 두리봉과 금학동, 봉황산, 웅치, 효포의 봉수대 부근, 금강나루 등에 각각 관군을 배치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11월 9일 동학농민군은 견고하게 형성된 방어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여기저기에서 포를 쏘기도 하고, 효포와 곰터 지역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우금치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로 향하는 동학농민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결국 40~50차례의 공방전을 거듭한 동학농민군의 공격은 큰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물러나야만 했다.

[결과]

1894년 11월 9일부터 시작된 우금치 전투는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 메웠다”고 할 만큼 동학농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1일 능치 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지역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유회군들에 의한 동학농민군 토벌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1894년 11월 9일부터 4일간 전개된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중 최대 규모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의 전세를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결국 ‘척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며 1894년 3월부터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치열하고 처절한 희생만큼이나 당시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전투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