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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마지막 격전지, 우금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6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홍동현

[개설]

1894년 9월 재봉기를 선언한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북상하기 위해서는 중부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공주를 점령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손병희의 북접 부대가 결합한 동학농민군 연합 부대는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으나, 2차에 걸쳐 전개된 공주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척왜’와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비록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새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일제강점기에는 자주독립을,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군, 공주에 집결하다]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아산만이 진주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 21일 조선의 내정 개혁을 내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여 친일 내각을 성립시킨 일본군은 이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을 본격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의 무력 점령 사건이 전해지기 시작한 6월 말부터 전국 각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재봉기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도 6월경부터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공주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서울로 향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회덕과 진잠에서는 무기고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인 반송의 접주 김필수의 주도 하에 “지금 외국이 내침하여 종사가 매우 위급하니 군대를 일으켜 한번 토벌하여 환난을 평정하고자 한다”며 군량과 마필, 총 등을 거두어가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 달동 출신의 접주 장준환은 부여·광천 등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8월 1일에는 공주 대접주 임기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정안면 궁원에 집결하여 공주감영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당시 공주감영만이 점령되지 않았을 뿐이지 공주부 내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에 의해서 장악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9월 10일 ‘척왜(斥倭)’의 명분을 내세운 재봉기를 선언하고 북상을 위해 논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동학 교단지도부 또한 ‘기포령’을 내린 뒤 논산의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였으며, 공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논산으로 집결하면서 그 수가 4만여 명을 넘어섰다. 특히 공주 유생 이유상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해 있던 부여 건평 유회군 2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의 동학농민군 연합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는 “나는 유도(儒道) 수령으로 동학당을 치고자 왔으나 장군(전봉준)을 만나 보니 감동되는 바 있어 협력”하기로 하였다는 이유상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차 봉기 당시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관과 농민군, 유생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일본군과 싸우자는 전봉준의 반일연합전선 제의에 선봉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마침내 대대적인 반일연합전선을 형성한 동학농민군은 천연의 요새이자 중부 지역을 석권할 수 있는 공주를 장악하여 서울로 북상하기로 계획하고 논산을 출발, 노성을 거쳐 공주 경천점과 이인역에서 관군 및 일본군 연합 부대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1차 공주 전투]

동학농민군이 논산을 떠나 공주로 진격하던 시기, 충청감영에는 이미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과 일본군에 의해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일본은 8월 16일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후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에 동학농민군을 모두 살육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서울에서 세 길로 나누어 압박하면서 동학농민군을 남쪽 바다로 몰아 몰살하겠다는, 일명 ‘청야작전’이라는 구체적인 전술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 결과 10월 24일 서로 분진대가, 26일에는 미나미가 이끄는 중로 분진대가 공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우선봉 이두황은 장위영 병사를 이끌고 10월 21일 목천 세성산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후 10월 27일경에 공주에 도착하였다. 좌선봉 이규태는 교도중대와 통위영 2중대를 이끌고 과천·수원을 지나 일본군 3중대와 합류하여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공주를 공격할 즈음 충청감영에는 경군을 합친 조선 관군이 대략 3천 2백 명이었으며, 일본군은 2천여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3일 마침내 경천점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우선 이인역 방향과 효포 방향으로 나누어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청산·영동 지역에서 이동해 온 북접계 옥천포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공주 대교에서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인역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군과 성하영의 경리청 부대, 스즈키 휘하의 일본군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인역 주변 산에 집결해 있었으며, 선봉에 서 있던 일본군 100여 명은 맞은편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과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 날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며, 날이 저물자 각각 공주감영과 경천점으로 후퇴함으로써 무승부로 끝이 났다.

이날 밤 효포를 지키고 있던 홍운섭과 구상조 부대가 대교 지역으로 이동하자 경천점의 동학농민군은 효포를 장악하였으며, 다음날부터 효포를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효포 뒷고개 산마루를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는 일단 관군이 물러서면서 일단락되었다. 한편 대교로 이동했던 홍운섭과 구상조 부대는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동학농민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공주감영으로 복귀하였다.

10월 25일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지휘 하에 효포에서 감영으로 넘어오는 고개인 웅치(곰티)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맞서 24일 공주에 도착한 모리오가 이끄는 서로 분진대가 선봉에 서고, 이규태 부대와 대교에서 복귀한 홍운섭 부대까지 합세하여 웅치를 방어하였다. 한낮이 지나도록 전개된 치열한 전투는 근대적 군사 훈련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상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이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버리고 후퇴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날 전투로 인해 웅치 골짜기, 시야산의 둔덕, 효포의 다리 주변에는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무수히 널려 있었으며, 그들이 흘린 피가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패배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전봉준은 우선 경천점으로 후퇴한 뒤 전열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차례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검했더니 남은 군사가 불과 3천 명이었다”라고 전봉준이 후일 공초에서 언급했듯이 이 날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이 났다.

[2차 공주 전투]

10월 23일에서 10월 25일에 걸친 전투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우선 이인과 판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구상조와 성하영 부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퇴진하였으며, 승기를 잡은 동학농민군은 이인 인근 산으로 올라가 일제히 횃불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횃불로 인해 인근 산은 마치 화성(火城)과 같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은 우금치, 금학동, 웅치, 효포 봉수대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모리오가 이끄는 일본군도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11월 9일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동쪽 판치 후봉에서부터 서쪽 봉황산 후록에 이르기까지 대략 30~40리에 걸쳐 마치 병풍을 친 듯이 깃발을 꽂아 놓고 군세를 과시하였다. 또한 금학동, 우치, 효포 월봉 주변의 고봉(高峰)에도 진을 치고 고함을 지르거나 포를 쏘며 공격할 듯한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주 공격로로 삼고 있던 우금치를 진격하기 위해 우금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오전 10시,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한때 지형지물을 이용한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150m 가량 떨어진 산허리까지 접근하기도 하였나, 관군과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접근을 막았다. 이렇게 우금치고개를 오르다가 밀리기를 40~50차례 거듭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시체만 쌓여갈 뿐 고개는 뚫리지 않았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 너머로 물러나야만 했으며, 웅치 전투를 끝으로 점차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지역별로 간헐적으로 전투가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지역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유회군에 의한 토벌만이 자행될 뿐이었다.

[공주 전투의 패배 원인]

모두 2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기간에 걸쳐 규모면에서도 4만 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교단의 북접 부대까지 가세한 연합 부대의 성격을 지닌 모든 역량을 쏟은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를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사거리만 수백 미터가 넘는 카트링식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 무라타 소총이었다. 더구나 1초에 한발씩 발사되는 이들 소총에 비해 농민군이 소지하고 있는 화승총은 불을 붙여 발사하는데까지 30초나 걸리며 사정거리도 10분에 1에도 못 미친 것이었다.

당시 김윤식은 일본군 1명이 농민군 수천 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군 1명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승총과 근대식 소총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우금치를 두고 벌어진 전투에서 높은 고지에서 쏘아대는 소총에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전술의 부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관군과 일본군이 이미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를 앞세워 전면전을 펼침으로써 이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는 세성산 전투와 홍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립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성급한 전면전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전투 그 이후]

4일간의 처절했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이인·경천을 거쳐 11월 12일 노성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대일연합전선을 호소하는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글을 발표하였으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호응하는 세력들을 결집하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노성에서 논산 대촌으로, 이어 소토산에서 황화대까지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대에 밀려 후퇴하였다.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은 학살 그 자체였다. 이때의 정황을 이두황은 “남은 도둑 천여 명이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새벽하늘에 별이 없어지는 것 같았고, 가을바람의 낙엽과 같았다. 길에 버려진 총과 창, 밭두덕에 버려진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약탈까지 일삼았으며,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유회군은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공주 접주 장준환 또한 이들에게 잡혀 효수를 당했으며, 유생으로 참여했던 이유상은 몸을 피해 종적을 감추었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동학농민군 18명이 죽었다는 송장배미, 길을 닦다가 해골이 여러 바지게 나왔다는 하고개, 점심을 먹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동학농민군이 즐비해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승주골·은골·방축골 등 당시 처절했던 공주 전투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재현되길 바라는 환향바위 이야기처럼 비록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새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일제시기 자주독립을,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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