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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670
한자 公州牛禁峙戰蹟
영어의미역 Ugeumchi Battle Site
이칭/별칭 우금치 전적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327-9 일원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해준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4년 3월 17일연표보기 - 공주 우금치 전적 사적 제387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공주 우금치 전적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성격 사적지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지정면적 5만 1896㎡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327-9 일원지도보기
소유자 충청남도 공주시
관리자 충청남도 공주시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격전지.

[개설]

공주 우금치 전적은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항전을 전개한 곳이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논산에 머물며 공주를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공주는 충청도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었고, 또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이기에 일단 이곳을 장악하면 승리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현재는 우금치라고 불리지만 당시에는 ‘우금티’라 불렀다고 한다.

약 3만을 헤아린 농민군은 일본군 200명을 포함한 약 2,500명의 관군과 1894년 10월 23일부터 이인(利仁), 효포(孝浦), 웅치(熊峙) 등지의 싸움에 이어 11월 8일 드디어 우금치에서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고개로의 진격 후퇴를 무려 40~50차례를 거듭한 혈전 끝에 거의 전멸하였다. 이 싸움 후 재기를 노린 전봉준은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변천]

우금치의 결전은 1주일 밤낮으로 계속되었는데 약 3만 명을 자랑하던 동학군이 겨우 천여 명만 살아남는 참패를 당하고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 11월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우금치고개를 정화하고 동학혁명위령탑을 세웠다.

[위치]

공주 우금치 전적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327-9 일원에 있다. 공주시청에서 우측 방향으로 약 1.65㎞ 가다 보면 우금치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측 방향으로 공주 우금치 전적이 위치해 있다. 즉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목인 견준산 기슭, 40번 국도변의 우금치고개 일원으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최후·최대의 격전지이다.

[현황]

공주 우금치 전적지에는 1973년 11월 11일 천도교 산하 동학혁명위령탑건립위원회에서 세운 동학혁명위령탑이 있다. 위령탑은 기단 위에 8각형의 낮은 단을 더하고 8각형의 비대석을 세운 형태이며, 위령탑의 전·후면에는 위령탑에 대한 설명과 도움을 준 분들에 대한 감사문이 있다. 위령탑 주변에는 4개의 큰 돌탑이 조성되어 있다. 19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을 기념하여 우금치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한 ‘다시 살아나는 우금티’라는 제목의 시비를 설치하였다. 이 시비는 본래 나무로 제작했으나 2021년 공주시와 우금치기념사업회가 우금치 전적지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석비(石碑)로 재정비하였다. 2020년에는 우금치 전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우금티 전적 알림터’가 개관하였다. 이와 함께 우금치 전적 일대에 야외 광장이 조성되고, 주차장 등이 정비되었으며, 우금티터널 정비, 편의시설 정비 등도 추진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적은 1994년 3월 17일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 우금치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의 뜻을 걸고 마지막 항전을 치렀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 고비를 잇는 큰 무대로서 뜻이 깊은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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