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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81
한자 敬天驛
영어음역 Gyeongcheonyeok
영어의미역 Gyeongcheon Post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관련기록]

경천역에 관한 기록은 여러 지리지나 읍지에 위치, 소속된 말과 노비의 수 따위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에는 “세조 6년 2월 5일자 기사에서는 성환도, 일신도, 증약도, 율봉도를 합하여 성환도라 칭하고 증약도찰방으로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경천역은 공주의 광정역·유구역·단평역, 연산현의 평천역과 함께 일신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성종실록』에는 “1475년(성종 6) 왕이 형조에 명하여 경천역에 정역되었던 죄인 김관을 초지량에 옮겨 충군하게 하고 박흥부는 그가 살던 고향으로 옮기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이 6곳이니 일신·광정·경천·이인·단평·유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남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주의 남쪽 40리 익귀곡면에 있으며 기마 7필, 복마(卜馬) 8필, 노(奴) 37명, 비(婢) 18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읍지』에는 “부의 남쪽 40리 정안면에 있다. 기마 7필, 복마 8필, 노 37명, 비 18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대동지지』에는 “남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산지』에는 “부의 남쪽 40리 익귀곡면에 있다. 기마 7필, 복마 8필, 노 37명, 비 18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경천역은 공주에서 노성(지금의 논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역으로 조선시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 정보, 그리고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한 교통 통신 기관이다.

[변천]

경천역광정·평천·단평·유구 등과 함께 일신도(日新道)[조선시대 충청도 공주의 일신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에 속하였다가, 세조 때 성환도(成歡道)[조선시대 충청도 직산의 성환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에 병합되어 성환도에 속한 22개 역 중 하나가 되었다.

[현황]

경천역은 조선시대 삼남을 연결하는 큰 도로에 있던 교통의 요지였으나 현재 흔적만을 알 수 있을 뿐 역참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지리지와 읍지 등을 통해 역참이 존재하였던 지역을 추측할 수 있다. 경천역과 관련하여 이곳에는 충청감사 심의신의 선정비, 사음 박준혁의 시혜비, 김교준의 불망비 등 비석 3기가 세워져 있었는데 도로가 확장되면서 현재는 경천교 옆으로 옮겨졌다. 이들 비석들은 경천역의 역사와 사회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역참이 있던 경천로는 지금의 국도 22호선과 비슷한 코스였던 것으로 보이며, 공주 중심가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시작되어 천안과 공주를 잇는 차령로와 연결된다. 『대동여지도』에서 이 길을 살펴보면, 공주에서 효포를 지나 무너미고개를 넘으면 경천역이 있고, 경천역에서 하천을 따라 난 길이 노성까지 이어진다.

[의의와 평가]

역참은 조선시대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던 중요한 시설이었다. 이런 시설이 공주에 있었다는 것은 공주 지역이 조선시대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게 해주며, 다른 지역을 연결해 주는 교통로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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