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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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賢書院事蹟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of Chunghyeon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장터길 28-6[공암리 369-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박범 |
양식 | 팔작지붕형의 비개|방형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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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12년(숙종 38)![]() |
관련인물 | 최규서|윤덕준|조상우 |
재질 | 대리석 |
높이 | 2.5m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장터길 28-6[공암리 3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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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충현서원 |
관리자 | 충현서원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에 있는 서원 사적비.
[개설]
충현서원 사적비는 충현서원(일명 공암서원) 안에 있는 서원 사적비로, 1712년(숙종 38)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 뒤에 봉안한 과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건립경위]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14) 화담학파의 학통을 이은 고청 서기(徐起)와 제자들의 강학 공간이 그 시초였다. 초창기에는 서당 세 칸 규모의 강학 공간이었으나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공주목사 권문해(權文海)의 적극적 재정 지원을 받아 공암서원(孔巖書院)을 세우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서원은 소실되었지만 1625년(인조3) 충현서원으로 재건 복설되었다.
충현서원은 충청도 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창건자인 서기가 강당 북쪽에 사당을 짓고 중국에서 가져온 주자 화상을 배향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주자 화상 또한 불타 없어졌다. 이후 중건되었으나 주자의 화상 대신 위판으로 대신하다가 1712년(숙종 38) 원유, 임우기, 최규일 등이 연천의 임장서원에 최유해가 중국에서 가져온 주자 화상이 봉안되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같은 해 9월 1일 그곳으로 달려가 주자 화상을 모사하여 충현서원 신판 뒤에 봉안하게 된다. 이 일을 기리기 위해 서원 뜰에 ‘충현서원사적비명(忠賢書院事蹟碑銘)’을 세우게 된다.
1790년(정조14)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는데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전국적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주자 영정도 이때 인근 공주향교로 옮겨졌다. 이후 1891년(고종28) 제단을 건립하고 1925년 주자 영정이 원래의 자리로 다시 복원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 원래의 자리로 복원되었다.
[위치]
충현서원은 대전과 공주의 사이에 있는 반포면 공암리에 자리한다.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를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이 소요되며, 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비는 충현서원의 입구 정면 우측에 있다.
[형태]
충현서원 사적비는 전체 높이 2.5m에 대리석 비신을 가졌으며, 보주를 얹은 팔작지붕형의 비개와 방형대석을 가진 동일 양식의 비석이다.
[금석문]
1712년(숙종 38) 대제학 최규서(崔奎瑞)가 짓고 이조판서 윤덕준(尹德駿)이 전(篆)하였으며 우의정 조상우(趙相愚)가 써서 건립된 것이다. 비문에는 ‘충현서원사적비명’이라 새겨져 있으며 충현서원이 건립된 배경, 주자 화상을 모사하여 봉안하게 된 배경, 중건 기록들이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충현서원의 건립 역사와 사적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