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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49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유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르는 말.

[개설]

유교는 불교 및 기독교와 함께 한국 3대 종교의 하나로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전통 종교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문화 등 한국 사회와 역사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한국 유교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전환점은 조선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크게 발전하면서 많은 사상적 유파를 형성하였으며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도 조선시대의 유교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는 유학자와 유교를 기반으로 국가와 민족 또는 가문에 충성을 다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따라서 선비의 기상이 담긴 유교에 관한 유적들이 많아 공주를 ‘양반과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 그리고 예(禮)의 고장’등으로 많이 지칭된다.

조선의 통치 이념이 유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주 지역에 대하여 ‘양반, 선비, 충절, 예’ 등과 같은 유교 관련 수식어가 많이 붙어 다닌 이유는 조선시대 공주목 지역에서 성장하고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이 이와 같은 유교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사상을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 유적]

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는 유교적 신념에 따라 목숨을 바치는 당당함의 힘을 지닌 선비의 정신, 국난을 당했을 때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리는 멸사봉공을 결행한 충절의 정신,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효의 정신 등을 몸소 실행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를 확인해주는 유적 또한 공주 지역의 여러 곳에 많이 남아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원이나 사당을 들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 지방에는 선조 때 건립된 충현서원을 비롯하여 인조조의 창강서원, 숙종조의 도산서원 등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중 충현서원은 1581년 국가가 서원제도의 정착과 함께 관청의 물력을 지원하여 건립한 공주 지역은 물론 충청남도 최초의 서원이다.

공주 지역에는 개인별 부조묘의 형태로 국가가 인정한 서원도 많다. 예컨대 덕천군 부조묘와 후손들이 사액이라고 주장하는 명탄서원(충절사)도 실은 부조묘의 형태였다. 이들은 주로 서원이 남설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사이에 서원의 형태로 바뀌었던 것이다.

공주 지역의 서원이나 사당은 대체로 다른 지역과 유사하게 충절 인물 포장이나 공신 등으로 국가가 인정한 인물이 태어나거나 살던 곳, 강학 등으로 유서가 깊은 곳 등에 주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증직·신원·정려 표창 등 인물 추존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조묘나 사우로 건립된 서원들도 있는데 충효사·충렬사·삼의사·표충사 등이 그러한 예 들이다.

공주 지역에 있는 서원이나 사당들은 70% 이상이 18세기 이후에 건립되었으며 그 중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에 건립된 경우도 많다. 그리고 명탄서원(충절사), 덕천군 사우, 충헌공 윤전 사우, 조견 사우처럼 이건된 경우도 있다. 이들 이건의 시기나 과정, 이유는 조선시대 공주 지역 사회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시되어야 할 연구 대상이다.

또한 공주 지역의 서원이나 사당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서사(書社)이다. 서사는 선배들의 강학 유서를 기리어 후학과 문인들이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공주 지역에는 현재는 터만 전해지고 있지만 성봉서사, 운산서사, 요당서사, 문회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주 지역 사족에 대한 논의나 서술에서 빠져서는 안 될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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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공주 지역 유교 관련 유적

[충효열 유적]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정착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사회적 신분의 고하(高下)나 귀천(貴賤) 및 남녀(男女)를 불문하고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자들을 매년 뽑아 상직(賞職)을 주거나 상물(賞物)을 주는 등 적극적으로 포상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그 행적의 정도에 따라 정문(旌門)을 세워주거나 경제적으로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자손의 부역을 경감해 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정려의 경우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효열 유적이다. 이러한 충효열의 사례들은 사람들을 감동·교화시켜 유교적 인간상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주읍지(邑誌)』정려조에는 공주 지방에서 정려를 받았던 인물로 38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종조의 정분, 세조조의 정지산, 선조조의 노응환, 숙종조의 최익한, 효종조의 윤빈, 인조조의 노숙, 광해군조의 유지걸, 순조조의 김시산, 고종조의 김영성, 철종조의 김영성 등을 들 수 있으며 열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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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공주지방 정려 관련 기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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