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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52
한자 不祧廟
영어의미역 Shrin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 사당.

[개설]

부조묘는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예부터 종갓집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위로 4대에 해당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제사를 모시던 자가 죽은 경우인데, 죽은 후 그 후손은 뒤를 이어 제사를 모실 때 죽은 이를 포함하여 선조 3대를 모시게 된다. 이때 기존에 모시던 가장 위의 선대의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고, 이 경우 그 선조의 신위를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는 것이 예의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왕의 허락 아래 신위와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부조묘라 한다. 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이나,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왕들은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라 여겨지면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 대상들은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변천]

부조묘가 처음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한나라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부조묘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고구려 중엽 이후 사당이 세워지면서부터로, 처음에는 불천위가 된 신주는 묘 밑에 설치하도록 하였으나 후손들이 종가 근처에 신위를 위한 사당을 지으면서 부조묘 형태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부조묘는 이렇듯 국가의 공인을 받았으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세워지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부조묘는 서원·사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서원과 사우가 교육적 측면과 함께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면 부조묘는 선조의 추숭 활동에 치중을 두고 있으며 왕의 직접적인 허락을 받고 건립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부조묘들은 조선 중기와 후기로 넘어가면서 서원이나 사우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서원이나 사우를 건립, 향촌 사회에서의 세력을 굳건히 하려는 사림들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서원이 점점 문중 서원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주에도 부조묘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로는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環輿勝覽)』과 『공산지(公山誌)』를 통해 여섯 개의 부조묘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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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부조묘

『조선환여승람』에서도 부조묘를 소개하는데, 『공산지』보다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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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부조묘

그러나 『공산지』 이전의 지리지나 읍지류 등에서 부조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어 두 기록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임난수 장군의 부조묘는 형태나 모양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부조묘이나 삼기면, 즉 장기면 나성리가 일제강점기 때 행정 개편에 의해 연기군으로 편입되어, 현재는 공주가 아닌 연기군 소속이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부조묘를 가졌던 인물들이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이거나 큰 업적을 쌓았던 것으로 보아 공주가 평범한 지역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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