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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목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88
한자 公州牧使
영어음역 Moksa
영어의미역 Magistrat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공주 지방을 맡아 다스린 정3품의 외직(外職) 관리.

[개설]

고려시대의 지방 제도는 성종 때 이르러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983년(성종 2)인 983년에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의 12개 주에 주목이란 외관을 파견하였는데, 12개의 주목 중에서 공주도 포함되어 상주하는 외관이 파견됨으로써 충청 지역 행정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부 수정을 거쳐 부분적인 변동이 생긴다. 목사는 정3품으로 고려 중엽 이후와 조선시대 관찰사 밑에서 목(牧)을 맡아 다스린 외직(外職) 문관을 일컫는다. 조선 전기의 진관 체제 하에서 지방 수령은 각각 군직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군정 관계상 수령 서로간의 위계가 형성되었다.

당시 지방의 군사 조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군절도사(수사)의 소재지를 주진이라 하고, 그 밑에는 각각 여러 개의 거진을 두어 첨절제사가 관장하였다. 충청도 공주의 경우에도 거진으로 설정되어, 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소 군현이 관할되었는데 공주진관에는 임천, 한산, 석성, 연기 등이 소속되었다. 공주목사는 병마첨절제사(서반 종3품직)를 겸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관찰사의 겸목제가 실시되면서 관찰사가 수령의 직책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겸직하는 수령직은 해당 도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부윤이나 목사 등이었는데, 충청도관찰사는 감영이 공주에 있었으므로 공주목사를 겸하여 목민관으로서의 기능을 행하였다.

조선시대의 행정 편제는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개혁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개혁에는 지방 제도도 포함되었는데, 과거의 8도제가 폐지되고 대신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었으며, 부 밑에는 한결같이 군을 두어서 다양하던 이전의 지방관이 군수로 통일이 되었다. 공주 지역의 경우에도 이전의 공주목이 공주군으로 바뀌어 목사 대신 군수가 부임하기 시작했다.

[관련기록]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공주목(公州牧) 조에 의하면 공주목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회덕현(懷德縣) 경계까지 69리, 진잠현(鎭岑縣) 경계까지 64리이며,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49리,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43리,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53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80리이며, 서쪽으로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57리, 연기현(燕岐縣) 경계까지 2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23리이다.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공주는 본래 백제 때 웅천(熊川)이었으나, 제22대 문주왕이 한성(漢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한 지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이 또 도읍을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평정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사를 머물게 하였는데, 당나라 군사가 물러가자 신라 문무왕이 모두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문왕웅천주(熊川州)로 고쳤고, 경덕왕이 웅주(熊州)로 고쳤으며, 940년(태조 23) 공주로 고쳤다. 983년(성종 2)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고, 995년(성종 14)에 12주(州)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공주안절군(公州安節軍)이라 칭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였고, 지공주사(知公州事)로 강등하였다가, 1341년(충혜왕 2) 원나라 활활치(濶濶赤) 평장(平章)의 아내인 경화옹주(敬和翁主)의 외향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회도(懷道)이다.

3. 『공산지(公山誌)』

‘충신’ 신증인물문과(新增人物文科)에 나오는 노응탁(盧應晫) 공주목사는 노혁(盧革)의 손자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문장과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에 조헌노응탁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였는데, 이러한 사적이 『중봉집(重峯集)』에 나와 있으며, 창의비(倡義碑)가 있다.

‘명환(名宦)’에 나오는 최재(崔宰)는 고려 공민왕 때 공주목사로 왔다. ‘충훈(忠勳)’에 나오는 이지례(李之禮)는 이지시의 아우로 공주목사(牧使)로서 소유사(召諭使)가 되었다. 평양에 있을 때 자신의 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혈전(血戰)하였으나 결국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태인(泰仁)에 사우를 건립했다.

‘음사(蔭仕)’에 나오는 공주목사로는 청주인 한덕일(韓德一), 연일인 정무(鄭堥), 용인인 이의록(李宜錄), 전주인 이몽경(李夢慶) 등이 있다. 이몽경은 덕천군(德泉君) 후손으로, 행의(行誼)가 대단히 높았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공주에 은거했다. 묘는 의랑면(義朗面) 용두촌(龍頭村) 후귀(後龜) 정상에 있고 간좌(艮坐)이다. 이처럼 『공산지』에서는 다른 지리지나 읍지류보다는 자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공주목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면 공주 지역에서 목사를 역임한 사람들의 기록이 나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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