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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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山李氏 |
영어의미역 | Yi From Gongsan |
이칭/별칭 | 공주이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박범 |
세거지 | 충청남도 공주시 월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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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남도 공주시 월성동 |
입향시기/연도 | 고려시대 |
성씨시조 | 이천일(李天一) |
[정의]
이천일을 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공주의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이천일은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왕 5) 중국 한나라로 가서 뛰어난 문명으로 대장군에 올라 흉노적(匈奴賊)을 정벌한 공훈으로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 않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고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무(文武)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천일의 후손들은 공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이후 공산이씨는 31세손 이백령(李栢齡)이 양산이씨, 34세손 이자송(李子松)이 수원이씨로 갈라졌다. 공산이씨는 36세손 양호공 이우(李偶)의 후손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이우의 아들 이저(李苧)는 고려조에 대제학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華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저의 아들 이사손(李思孫)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이사손의 아들인 이엽(李曄), 이서(李曙)의 다음 세대에서 경력공파(經歷公派), 어사공파(御使公派), 공숙공파(恭肅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강양공파(剛襄公派) 등 7파로 분파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전기 지리지에는 공주의 토착성씨로 공산이씨가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인물조에 공산이씨 이명덕(李明德)이 등장하고 있다. ‘공산’은 ‘공주’의 이칭으로 공산이씨(公山李氏)를 공주이씨라고도 한다.
[입향경위]
공산이씨는 공주 지역의 토착 성씨로 조선 초기의 각종 지리지의 성씨조에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황]
공산이씨는 조선에서 꾸준하게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총 16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으로 1396년(태조 5) 사봉(沙峰) 이명덕은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대사헌, 동지총제를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건(李鍵) 역시 1624년(인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한편 공산이씨 가운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인물들이 주목된다. 이명덕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여 대승한 이천장(李天章)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부산이 위급함을 알고 출전, 순절하여 부산 충절사에 제향된 이연헌(李延憲) 등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부령, 길주, 단천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옥탑평 전투에서 전사하여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고 경성 창렬사에 배향된 이붕수(李鵬壽) 역시 공산이씨이다.
공주향교의 문서에는 공산이씨들이 전 시기에 걸쳐 다수 등재되어 있으며, 특히 공주 공산성 내의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도 공산이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공주 지역의 대표 성씨로, 유력한 사족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51년(철종 2) 명탄서원을 중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현재 명탄서원의 아랫동네인 공주시 월송동에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공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764가구에 3만 51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인 3.1운동 시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필주(李弼柱),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일본 천황의 암살을 기도한 이봉창(李奉昌) 같은 인물은 근대 공산이씨를 대표하는 애국지사였다.
[관련유적]
이명덕과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의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1490년(성종 21) 건립된 명탄서원과 이명덕과 이명성의 묘소가 있는 대전시 정생동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