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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98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족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유구시장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오강표(吳剛杓)|김관회(金寬會)|김수철(金洙喆)|이승현(李升鉉)|조병옥(曺秉玉)|현석칠(玄錫七)|황병주(黃秉周)|황연성(黃璉性)|황타관(黃他官)|강연(姜沇)|강태하(姜泰河)|권중륜(權重倫)|김사현(金士賢)|김삼룡(金三龍)|김오룡(金五龍)|김원일(金元日)|김재록(金在錄)|전정길(全鼎吉)|김정쇠(金正釗)|김지성(金知成)|김현경(金賢卿)|김희봉(金喜鳳)|남순길(南順吉)|노규현(盧奎鉉)|노명우(盧明愚)|노상우(盧相羽)|유석우(柳錫瑀)|문백룡(文百龍)|박루이사(朴婁以士)|박장래(朴璋來)|박준빈(朴準斌)|서광순(徐匡淳)|신성우(申誠雨)|신의득(申義得)|안기수(安期壽)|안성호(安聖鎬)|안창호(安昌鎬)|양재순(梁載淳)|오익표(吳翼杓)|원강희(元江熙)|유길도(兪吉道)|유준석(柳俊錫)|윤봉균(尹鳳均)|윤원식(尹元植)|윤창선(尹昌善)|이규상(李圭尙)|이기한(李綺漢)|이돈석(李敦錫)|이동안(李東案)|이명보(李明甫)|이병억(李秉億)|이상림(李相霖)|이우상(李雨相)|이월성(李月星)|이홍규(李弘珪)|이희도(李熙道)|정재철(鄭在喆)|정화순(鄭化順)|정희준(鄭熙準)|조정관(趙正觀)|최범성(崔範聲)|최병한(崔炳翰)|현언동(玄彦東)|홍점산(洪點山)|이규남(李圭南)|영명학교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공주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공주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첫 시도는 3월 7일 있었고, 3월 10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사전 모임이 있었으며, 3월 12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유구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3월 15일과 17일 양일에 거쳐 공주에서 일어났고, 4월 1일부터 5일까지 공주·정안·의당·장기·계룡·우성·탄천·경천·주외·목동 등지에서 연인원 1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 자본주의 침략에 항거하여 반외세·반제국주의·반봉건의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격전을 전개하였다. 오강표(吳剛杓)와 심상교는 을사조약 체결에 비분을 토로하였으며, 군대 해산 이후에는 소규모 의병을 조직하여 공주 인근에서 무력으로 일제를 공격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추진된 토지조사업으로 일제와 일본인들의 토지 점탈이 행해지고, 일제 금융기관의 설립으로 금융 수탈이 자행되었다. 조선총독부 행정 및 치안기관의 설치와 탄압으로 반일 감정은 고조되어 갔다. 한편, 근대 교통의 중추인 철도가 공주를 벗어나 경부선과 호남선이 부설되자 공주의 경제력은 약화되었다.

[발단]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고, 서울과 전국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고종의 국장을 참례한 인사들이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참관하고 귀향하여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공주에서는 3월 7일 앵산공원 야소교회당 앞에서 국장을 참례한 영명학교 졸업생 박장래(朴璋來)와 영명학교 학생들의 모임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경과]

1) 황병주의 독립만세운동 전개

유구에서 3·1운동은 황병주(黃秉周)의 주도 하에 3월 14일 오후 4시경 유구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황병주는 『매일신보』를 통하여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사실을 알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황병주는 유구시장에 있는 군중 30여 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모자를 벗어서 흔들었다. 이에 군중들도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점차로 늘어난 군중들은 계속하여 만세를 부르며 우(牛)시장으로 행진을 하였다. 행진하던 군중들은 관내를 순찰하던 일본인 순사 다카야마 덴에몬시게후미[高山傳右衛門]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다카야마[高山] 순사는 군중들의 만세운동을 저지하면서 수차에 걸쳐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오히려 증가하여 중국인 수이수콩[隨述孔]의 집에 이르러서는 약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순사는 순사보 박용진(朴龍珍)에게 명령하여 황병주를 체포하여 유구주재소로 연행하게 하였다.

황병주가 연행되자, 이승현(李升鉉)은 시장에 있던 약 100여 명의 군중에게 “어찌하여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라 하면서 황병주를 구출하려 주재소로 가자고 군중들을 독려하였다. 황연성(黃璉性) 역시 하재옥의 집 앞에서 박준빈(朴準斌), 정희준(鄭熙準), 이우상(李雨相), 유석우(柳錫瑀), 노상우(盧相羽)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정희준은 군중에게 “너희도 조선인이 아닌가?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만세를 부르자”면서 군중들을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승현황연성의 주도로 주재소에 도착한 군중 가운데 황연성과 박준빈은 고산[高山] 순사에게 “어째서 황병주를 석방치 않는가? 즉시 석방하라”고 따지면서 고산 순사의 가슴을 내려쳤다. 현우석(玄宇錫)은 군중이 갖고 있던 몽둥이를 빼앗아 주재소 문과 등을 때려 부수었다. 이우상·유석우·안만원(安萬元)·유진태(兪鎭台) 등과 같이 주재소에 갔던 이정춘(李正春)은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였으며, 김상규(金相圭)[相敎]도 유리창을 파손하였다. 강태하(姜泰河)·윤창선(尹昌善)·이홍규(李弘珪)·조병옥(曺秉玉)·김재록(金在錄)·김지성(金知成)·권중륜(權重倫) 등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2) 김희봉의 만세운동

유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김희봉(金喜鳳)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독립만세를 부른 황병주 외 20여 명이 유구주재소에서 공주경찰서로 압송되자, 황병주의 고용인인 김희봉은 격분하여 황병주의 뒤를 이어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김희봉은 3월 17일 오후 5시 공주시장으로 나가 시장에 있던 군중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당시 시장에 있던 군중 1,000여 명이 김희봉의 독립만세 선창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곧 이어 일본 순사들이 출동하여 김희봉이 체포됨으로써 이 독립만세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3월 12일에는 공주와 공주 부근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강력한 제지를 받았고, 주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공주 부근에서는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에 일본은 보병 하사 이하 6명을 출동시켜 제지하였고, 13일에는 강제로 해산을 시켰다.

3) 박장래와 「조선독립가」

박장래는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하여 2월 28일 상경하여 3월 8일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목격하고 「조선독립가」를 배웠다. 박장래는 고향인 아산군 송악면 거산리로 가지 않고 공주로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모임을 3월 10일에 가졌다. 박장래는 영명학교 조교인 김수철(金洙喆)의 방에서 영명학교 학생인 안기수(安期壽)와 신의득(申義得)에게 서울 및 기타 각지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공주의 학생들은 무슨 까닭에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였다.

이에 신의득은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 생도는 10여 명 뿐이라 시위운동을 할 수 없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에 박장래는 “공주에는 농업학교도 있고 보통학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경성에서는 여학생까지 나서서 독립시위를 하고 있는 판에 공주에서는 남자다운 의기와 용기가 없는 자들이 많다”고 말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어 박장래는 종이에 쓴 자신이 만든 독립가를 건네주었다. 안기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림엽서에, 신의득은 시계 수리 보관증에 각각 독립가를 기록하였다. 이 모임 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수철은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4)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활약상

4월 1일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최초의 회합은 3월 24일 오후 9시경 대화정(현 중학동) 영명학교 교실에서 있었다. 참석한 인사들은 공주 예수교회 목사 현석칠(玄錫七), 천안 예수교회 목사 안창호(安昌鎬),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와 현언동(玄彦東), 영명여학교 교사 이규상(李圭尙), 동경 유학생으로 2월부터 귀향하여 독립운동과 관련한 활동을 전개하던 오익표(吳翼杓)와 안성호(安聖鎬), 그리고 김사현(金士賢) 및 그 외 1인이었다.

회합에서 오익표가 전국 각지에서는 이미 만세운동을 하고 있으니 공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었고, 각기 자기의 역할을 결정하였다. 현석칠은 전체적인 지휘를 맡았다. 김관회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반포하고, 영명학교와 공주공립보통학교(현, 공주중동초등학교)의 남학생을, 현언동은 공주농업학교 학생을, 이규상은 영명여학교와 공주공립보통여학교 학생을 담당하여 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오익표는 외부 지방 주민을, 안성호는 지방 주민을 만세운동에 참여시키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오후에 공주시장이 열리는 것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날인 25일에 김관회는 학교 조수인 김수철을 만나 위의 회합을 상세히 설명하고, 영명학교 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여시키도록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1000매의 제작을 의뢰하였다. 제작 비용으로 10원을 지급하였다. 이미 박장래와 만나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김관회의 제안에 동의한 김수철은 영명학교 재학생으로서 귀향 중인 유준석(柳俊錫), 노명우(盧明愚), 강연(姜沇), 윤봉균(尹鳳均) 등에게 서울의 만세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이 공주에서 일어날 경우 참여하기를 통보하였다.

3월 29일에는 졸업생인 이규남을 방문하여 4월 1일 공주시장의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3월 30일에는 위에 통보한 학생들과 자택에 모여 김관회의 뜻을 전하며 이들의 동의를 얻었으며, 양재순(梁載淳)에게도 같은 뜻을 전하여 찬동을 얻었다.

3월 31일 오후 3시경 유준석·노명우·강연·윤봉균 등과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모였다. 이들은 윤봉균이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을 때 구해 온 「독립선언서」를 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신성우(申誠雨)가 등사판을 돌리고, 윤봉균 등이 인쇄를 돕고, 유준석은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절반으로 접어서 1000매를 제작하였다.

현언동은 3월 30일에 상반정(현 봉황동)에 주거하는 공주농업학교 교사 이성구(李晟求)의 집으로 가서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니 농업학교 학생들이 참여토록 권유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규상은 박루이사(朴婁以士)에게 회합의 취지를 알리고 공주 공립보통여학교 학생들을 참여시키는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여 즉시 승낙을 얻었다. 박루이사는 27, 28일경 욱정(현 반죽동)에 있는 영명여학교 여교사인 이원용(李元鎔)의 집으로 찾아가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교 여학생과 그 가족을 운동에 참여시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한다.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를 마친 김수철·노명우·윤봉균은 이규남으로부터 태극기 1개씩을 받아 휴대하고, 노명우·유준석·강연·양재순은 「독립선언서」를 100매씩 가지고 시장으로 나갔다. 오후 2시 시장에 있는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규상에게 전해 듣고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의한 김현경(金賢敬)도 이규남이 만든 태극기를 받아 자택인 본정(현 중동)에 모인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장으로 들어가 김수철 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골목을 오후 6시까지 활보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은 저녁에 김관회의 집에서 다시 모여 협의를 하던 중에 일본 헌병과 이종덕(李鍾德)에게 체포되었다. 공주경찰서에 21일 동안 구치되다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5) 4단계로 전개된 이기한의 독립만세운동

4월 1일 정안면 석송리에서는 이기한(李綺漢)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총 4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석송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소재지인 광정리를 향하여 행진하는 단계이며, 제2단계는 그 도중에 내송리(내촌리)에서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광정리에 도착하여 정안주재소를 파괴하는 단계이다. 제3단계는 이어서 광정리에서 다시 석송리로 귀가하던 인사들에 의하여 석송리 모퉁이에서 일경과 격렬한 격투를 벌였으며, 마지막 제4단계는 야간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른 것이다.

제1단계는 석송리에서 이기한 등이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석송리에 거주하던 유림으로서 평소 주민의 존경을 받아오던 이기한·이병억(李秉億)은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국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고서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석송리 주민들을 모아 놓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호소하였다. 이기한은 주민들에게 큰 소리로 “모두 나를 따르라”고 말하면서 선두에 나섰다. 이어서 이동안(李東案, 東葉)·정재철(鄭在喆)·문백룡(文百龍)·김정쇠(金正釗)·최병한(崔炳翰)·남순길(南順吉) 등 주민 20~3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면소재지인 광정리를 향하여 행진을 하였다. 조금 후에는 조정관(趙正觀)이 태극기를 들고 광정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제2단계는 내송리에서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광정리주재소를 파괴하는 활동이 있었다. 석송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군중들이 광정리로 가던 중에 내송리에 이르러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당시 운궁리 주민 20명은 내송리에 있는 모범림(模範林)에 나무를 심는 부역으로 동원되어 12시경에 거의 식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때 운궁리 주민들은 태극기 2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오는 수 백 명의 군중을 보게 되었다. 이들 군중 가운데 몇 명이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자 부역 나온 운궁리 주민들 중 최범성(崔範聲)·윤원식(尹元植)·이월성(李月星)·원강희(元江熙)·김오룡(金五龍)·이명보(李明甫)·이희도(李熙道)·이돈석(李敦錫)·유길도(兪吉道) 등이 합세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작업 도구로 사용한 쇠스랑·곡괭이·삽·지게 등으로 광정리주재소를 파괴한 사람들도 있었다.

광정리에 도착한 만세 군중들 가운데 3~4명이 먼저 쇠스랑·곡괭이·삽 등을 사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기한이 “주재소를 파괴하자”는 말과 함께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라고 독려를 하면서, 태극기 깃대로 주재소 문등(門燈)을 깨뜨렸다. 이어 윤원식·이월성·김오룡·이돈석·김삼룡(金三龍)·홍점산(洪點山)·황타관(黃他官) 등이 적극 호응하여 순사가 부재중인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윤원식은 갖고 있던 삽을 휘둘러 주재소 게시판을 부수고, 이월성은 삽을 이용하여 주재소 좌측 담을 파괴하고 창문틀을 깨뜨렸다. 김오룡은 발로 담을 차서 무너뜨리고, 이돈석은 주먹으로 현관 우측의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김삼룡도 손으로 왼편 담장을 부수었고, 이월성은 계속하여 무너진 담장을 내리쳤다. 그리고 홍점산은 지게받이로 주재소 건물에 타격을 가하였고, 홍타관은 발길로 유리창을 걷어차서 깨뜨리는 등 주재소의 시설물들을 파괴하였다.

3단계는 광정리에서 석송리로 돌아오던 만세 군중들이 석송리 모퉁이 주막에서 일경과 격렬한 격투를 전개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광정리주재소가 파괴되고 있다는 통보를 오후 3시에 접한 공주경찰서는 순사 2명 키하라 신치로[木原新次郞], 이쓰지[黃山逸二]와 순사보 이근남(李近南) 및 헌병 군조 나카고우키 미요시[中聖美吉] 이하 병졸 5명을 광정리로 급파하였다. 이들 일행은 자동차로 오후 4시경에 출동하여 석송리 주막 김원일(金元日)의 집에 4시 40분경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광정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석송리로 돌아와 주막에서 쉬고 있던 만세 군중 14~15명이 도로로 뛰어나와 일경들을 태운 자동차의 진행을 막고 손을 흔들면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를 들은 부근 주민들 14~15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도로를 가로막자 자동차는 더 이상 주행을 하지 못하고 정차하게 되었다. 자동차가 멈추자, 군중들은 4~5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더욱 크게 만세를 부르면서 일경에게 접근하였다.

자동차에서 하차한 순사 미하라[木原]가 주동자로 이동안을 지목하고 체포하기 위하여 이동안의 왼편을 결박하고 오른손 마저 잡으려 할 때, 노규현(盧奎鉉)·정화순(鄭化順)·장기현·문백룡·정재철·서순석 등이 “그가 무슨 죄가 있어 잡아 가려는가?”라고 따지면서 순사를 전후좌우에서 떠밀었다. 서순석은 순사의 팔을 잡고 이동안을 끌어냈으며, 김정쇠와 문백룡은 순사의 어깨를 밀쳐 이동안의 포박을 저지하여 결국 이동안은 결박에서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일경들은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각기 수명의 군중들에게 포위되어 군중들과 격투가 벌어졌다.

이동안의 체포에 실패한 일경들은 서광순(徐匡淳)과 정재철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군중들은 체포된 이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였다. 김정쇠와 전정길(全鼎吉)은 순사에게 덤벼들어 체포를 방해하고, 문백룡과 장기현 등은 순사를 물어뜯었다. 체포에서 풀려난 이동안은 이근남에게 “너는 이근남이 아니냐? 너도 조선 사람인데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면서 주먹으로 이근남을 구타하였다.

또한 헌병군조의 칼을 탈취하려고 실랑이를 벌여 헌병의 칼을 땅에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헌병군조는 총을 뽑아 발포를 하였다. 이 발포로 현장에서 이상림(李相霖)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총격으로 군중들을 제압한 순사 등은 이동안과 정재철 등 주민들을 체포하였다.

제4단계는 일본 경찰에 의하여 만세 군중들 다수가 체포를 당한 후 광정리를 중심으로 야간에 횃불만세운동이 있었다. 석송리 주막에서 일경들이 광정리로 출동하는 것을 제지하고 격투를 벌인 결과 이동안, 정재철 등 다수의 만세 군중들이 체포되어 공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일경에 체포되지 않은 이기한 등은 다시 모여 수백 명이 광정리주재소로 가서 밤까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횃불만세운동은 3일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장기면에서는 4월 1일 밤 9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도계리 주민들 약 100여 명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세우고 횃불을 지피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운동의 급보를 접한 공주경찰서는 경찰과 수비대 보병을 함께 출동시켜 총검으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한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의당면에서는 4월 1일 약 8개소에서 400여 명의 면민들이 각각 무리를 지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에서 10개소에서 약 600여 명이 만세를 연호하였다. 계룡면에서는 4월 2일에 경천시장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시장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성면에서도 4월 2일 밤에 쌍신리와 도천리 주민들이 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탄천면에서는 4월 3일 밤에 면내의 각 마을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들이 마을의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일제는 한국인의 독립만세운동을 민족독립운동으로 인식하지 않고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으로 판단하여 공주경찰서 및 각 주재소의 경찰과 헌병·보병 및 보조원을 동원하여 무력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1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100여 명 이상이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고 6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종교인·유학자 및 교사가 주도하고, 농민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독립만세운동 전개 과정에서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저항 의식을 표출한 인물들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 군경과 대치하면서 무력적 저항을 감행하였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의 한 형태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비폭력적·평화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전 연령층이 골고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참여 인원은 1만 명 이상으로 타 지역보다 많은 인사가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9.16 관련시청각 교체 1. 삭제-일제강점기 공주고등보통학교(GC017P1908) 2. 등록-3.1운동 기념탑(GC017P2952), 3.1절 기념 행사(GC017P2953)
2013.09.09 관련인물 추가 관련인물에 이규남(李圭南) 추가
2012.09.20 관련 인물 한자 수정 강연(姜沇) -> 강윤(姜沇) 김현경(金賢敬) -> 김현경(金賢卿)
이용자 의견
박** 관련인물 - 이규남(李圭南 1898- 1971)은 2004년 대통령표창자 입니다. 공훈록에 등재되어 있어요.
성명누락? 첨가요망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관련 인물 추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9.04
관**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윤과 김현경의 표기 오류는 수정하였습니다. 이명은 표기 정책상 추가가 어렵고, 이규남의 경우 생존자는 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활란과 황인식의 경우 문헌이나 연구 결과 분명한 활동이 있었던 근거가 밝혀지지 않았을 경우 추가가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9.20
박** 관련인물- 강연(姜沇)의 한글표기는 강윤(姜沇), 김현경(金賢敬)은 賢卿, 順点이란 이명도 있고요, 유준석(柳俊錫)은 愚錫, 寬玉이라는 이명도 첨가하는 것이 어떨지요? 이규남(李圭南 1894-)은 2004년 대통령표창자 성명누락? 이활란(李活蘭)황인식(黃仁植)도 모종의 활동이 있었던 것 같네요. 영명100년사참조요망 201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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