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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96
한자 忠淸監營
영어음역 Chungcheong Gamyoung
영어의미역 Chungcheong Headquarters of the Provincial Governo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603년(선조 36)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603년(선조 36)
폐지연도/일시 1932년 10월 1일연표보기

[정의]

1603년에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설치된 충청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

[개설]

충청감영은 공주 지역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1603년(선조 36)에 공주 지역에 설치되어, 1932년 대전 지역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있었다. 현존하는 많은 조선 후기의 문서들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으로의 공주 지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유적에 대한 훼손 탓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지만,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금남루 사진, 충청남도 도청과 관련한 사진, 신사 관련 사진, 공주여자고등학교 관련 사진 등이 남아있다.

[제정경위 및 목적]

감영은 각도의 관찰사가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충청감영은 본래 청주 지역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공주 지역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주 지역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공주 지역은 그 지형과 지세가 북으로는 차령산맥금강이 가로막고, 남으로는 계룡산을 비롯하여 시가지 주변을 300m 정도의 고지가 둘러쌓은 천연의 요새지로서 서울과 호남 지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에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청주보다는 공주가 충청도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관련기록]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 지역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오늘날의 군지, 시지, 마을지와 같은 지리지류가 있다. 관찬(官撰) 지리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地)』 등이 있고, 공주 지역에 관한 사찬(私撰) 지리지는 『공산지(公山誌)』가 있다.

지리지는 공주의 연혁, 행정 구역, 인구, 지리 환경, 주요 시설물, 토지 이용, 관리 구성 등 일반 현황에서부터 공주의 풍속, 공주의 성씨, 공주의 인물에 대한 기록까지 여러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공주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가 있는데, 지도는 지리지에 포함된 것과 국가에서 전국의 지도를 제작하면서 만들어진 지도가 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감영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공문서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개영 후의 것인 조선 후기 문서가 대부분이다. 공문서는 작성한 주체와 작성 목록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전하는데, 다음 같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군현의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한 첩보류로 『기양문첩(岐陽文牒)』이 있고,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문서인 『금영계록(錦營啓錄)』·『충청도관찰사장계(忠淸道觀察使狀啓)』, 감영의 운영과 군사 조직 세금 수취 등의 관련 문서인 『충청감영군수소용별록성책(忠淸監營軍需所用別錄成冊)』·『충청감영군수소용성책(忠淸監營軍需所用成冊)』·『충청감영속쌍수산성편오군총성책(忠淸監營屬雙樹山城編伍軍摠成冊)』 등이 있다.

또한, 도내 제반 현황을 파악하는 『금영총록(錦營摠錄)』·『호서감영일기(湖西監營日記)』·『금영공안(錦營公案)』·『호서감영각고중기(湖西監營各庫重記)』·『호서감영미포중기(湖西監營米布重記)』 등이 있고, 조정에서 내린 문서인 『유호서대소민인등윤음(諭湖西大小民人等綸音)』·『유경기홍충도감사수령등윤음(諭京畿洪忠道監司守令等綸音)』·『포폄목(褒貶目)』 등이 있다.

그밖에 백성이 충청감영에 올린 소지(所志)도 많이 남아있는데, 공주 사람 박성필이 올린 소지와 공주최씨 집안의 노비 손순의 소지가 도정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충청감영에서 일반 백성에게 발급한 문서로 완문(完文)류의 문서가 흔하게 발견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증명서와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내용]

우리나라에서 각도에 관찰사가 파견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인 1388년부터이다. 당시 충청 지역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부 지역까지 포함하여 양광도라 일컫고 있었으므로, 관찰사의 정식 명칭은 양광도도관찰출척사였다. 그런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양광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감영이 어디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양광도가 충청도로 바뀐 이후 조선 전기에는 청주 지역이 충청도 감영 소재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충청도조에 의하면, 조선시대 1395년(태조 4) 양주와 광주가 거느린 군현은 경기에 속하게 하고, 충주·청주·공주·홍주가 거느린 군현은 충청도라고 칭하여 관찰사를 두고 청주에 감영을 개영하였음을 밝혔다.

임진왜란이 지난 1603년(선조 36)에 공주 지역에 충청감영을 개영하였고, 충청도관찰사가 공주목사를 겸하였다. 나아가 충청도관찰사 윤돈이 1606년(선조 39)에 유영(留營)을 파함으로써, 이후의 충청도관찰사는 공주 지역에 머물렀다.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의 개영 시기에 대해 종전에는 1598년·1600년·1602년 등의 견해가 있었다. 우선 1988년에 편찬된 『공주군지』에서는 충청감영의 개영 시기를 1598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598년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개영 기록이 조선시대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600년 설은 『충청감영읍지』에 실려 있는 「선화당이건기」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1600년 1월 13일에 부임한 권희(『선조실록』에 의하면 권희는 1599년 12월 26일 충청감사로 임명됨)는 감영을 사사로이 건립하다가 암행어사의 계로 체직되었고, 1600년 4월 3일에 후임 장만(張晩)이 부임(『선조실록』에 의하면 1600년 3월 27일 이전에 장만의 충청감사 인사가 있었음)하고 있으므로, 권희는 2개월 남짓 재임한 셈이다. 따라서 1600년에는 공주 지역에 충청감영 건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1602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재차 부임한 유근(柳根)은 감영을 설치하는 절차를 계문하여, 1603년에 겸목하라는 비답이 내려지니, 쌍수산성을 수축하고, 비로소 영사와 공북문·진남문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개영 시기는 1603년(선조 36)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후임 관찰사 이홍로의 충청도관찰사 제수는 1604년 2월 20일에 이루어졌다.

충청도관찰사의 겸목과 함께 이루어진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개영 이전에는 감영으로 본영(本營)과 유영(留營)이 있었는데, 충청도의 본영은 청주였으며, 공주 지역에 유영이 설치되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공주 지역의 충청감영 때부터는 관찰사의 겸목제가 실시되어, 공주목사를 겸직하는 충청도관찰사가 공주 지역에 상주하게 됨으로써, 공주 지역이 명실상부한 호서의 중심 고을이 되었다.

[변천]

1602년(선조 35)에 충청도관찰사로 두 번째 부임한 유근은 공주 지역에 공산성을 수축하고, 1603년(선조 36)에 감영을 공산성 안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공산성 안의 충청감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성지(城地)가 좁아서 다음해인 1604년(선조 37)에 공주 고을의 구영(舊營)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마 이때 유근이 수축한 공산성 안의 충청감영 건물은 인조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공주 지역으로 파천하여 5박 6일간 공산성에 주필할 때 행재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1646년(인조 24)에 충청도관찰사 임담충청감영을 다시 공산성 안으로 옮겼다. 1645년(인조 23) 12월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임담은 1646년 4월에 안익신·유탁 등의 황지지변(潢池之變 : 전국적 규모가 아닌 좁은 지역 내의 변란)을 토평하였다. 그런데 구영에 방어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반 사건이 또다시 발발할 것을 우려하여 40여 년간의 구영에서의 충청감영 생활을 청산하고, 1646년(인조 24) 7월에 공산성 안으로 황급히 충청감영을 옮긴 것이다.

1646년(인조 24) 공산성충청감영의 모습에 대해 신유(申濡)[1610~1665]가 쓴 「호서순영중수기(湖西巡營重修記)」(『공산지』에 수록되어 있음)에서는 ‘성의 동쪽은 월성산의 쌍봉이 우뚝 솟아 있어 골짜기는 깊고, 감영 건물 절반은 낭떠러지에 걸쳐 있고 집들은 마치 돌에 붙은 굴조개와 같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충청감영의 위치는 정청(政廳)에서 산성까지의 거리가 5리나 떨어져 있고, 충청감영에 이르는 성 안팎의 길 또한 험하여 교령을 받들고 물품을 공급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고을에서 공첩(公牒)을 갖고 충청감영을 찾아오는 자가 몸을 의탁할 주막이 없어 배고파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감쌀 수가 없어 충청감영의 영속과 각 고을 사령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충청감영이 공주 고을 구영으로 복원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8년이 지난 1653년(효종 4)에 충청도관찰사 강백년(姜栢年)봉황산 아래의 옛터로 또다시 충청감영을 옮겼다. 그리고 이 때 이전(移轉)에 앞서 충청감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8년 전의 구영으로 외연이 서 있는 것은 오직 청사(廳舍) 뿐이고 기타 건물은 철거하여 옮겼기 때문에 황량하여 복원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소요 경비는 충청감영에서 환곡의 출납을 절약하여 기와와 벽돌은 재목과 함께 금강 상류에서 뗏목으로 나르고, 공사는 1653년(효종 4) 겨울에 시작하여 다음해 봄에 완성하였다.

그런데 강백년에 의해 복원된 구영은 대천(大川)[현재의 제민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홍수를 당하여 관아가 침몰당하여 건물이 벗겨지고 퇴폐하여 관찰사의 처소인 피향당(披香堂)에 임시로 머물러 다스리게 되니, 5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감영의 이전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되었다.

1703년에(숙종 29)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연(金燃)은 공산성 안으로 충청감영을 옮길 것을 청하였고, 1704년(숙종 30)에는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이제(李濟)가 편리함을 내세워 서쪽 봉황산 아래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제의 의견을 지지하였으나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1706년(숙종 32)에 충청도관찰사 이언경이 착공하여 미완성한 것을 1707년(숙종 33)에 충청도관찰사 허지가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충청감영 이전의 필요 자금은 환곡을 출납할 때 절약하여 마련하고, 가난한 자만을 취로케 하여 빈민 구호의 효과도 거두었다. 새로운 충청감영 건물의 총규모는 260칸으로, 동향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아 건물이 배치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충청감영이 건립된 터는 우리가 오늘날 감영 터로 알고 있는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일대를 말한다. 충청감영은 이곳에 1707년에 자리 잡은 이후 1932년 대전 지역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200여 년간 있었다.

[현황]

충청감영의 터는 현재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부지 대부분은 운동장, 교실 2동, 강당, 특별실, 기숙사가 차지하고 있다. 원래 1706년(숙종 32) 9월 충청도관찰사 이언경이 부임하여 선화당을 건립한 이래 500여 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1896년(고종 33) 충청남도로 분리되고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이 강제로 합병된 이래 충청감영 터에 충청남도 도청을 신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식 건물로 충청남도 도청을 신축하면서 가장 많은 충청감영의 유적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 지역으로 이전한 다음 도청 건물을 학교 시설물로 사용하여오다, 1976년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본관 건물을 신축하면서 또다시 충청감영 유적들의 훼손을 가져왔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친 충청감영 유적에 대한 훼손 때문에 본래의 충청감영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충청남도 도청 정문과 신사 터가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외의 충청감영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내외에는 시대와 형태가 다른 주초석 등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그래도 몇 군데 집약해서 본다면 강당, 특별실, 교문, 구 담배인삼공사 공주지점을 비롯한 개인 가옥 주변 등에 유물이 흩어져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주초석 외에도 충청감영과 관련한 사진들이 남아있으며, 1837년 제작되어 충청감영에서 사용하던 금영측우기가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충청감영이라 하면, 오늘날 대전 지역과 충청남도와 충청북도까지 아우르는 광역의 도청이었다. 조선시대 충청감영은 영호남과 어깨를 견주는 호서 지역의 지방 거점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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